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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의 열정’ 꽃피우다…실버모델, 그 치열한 경쟁 세계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7. 16. 19:48
제아무리 장동건, 김태희라 해도 찍을 수 없는 광고가 있다. 시커먼 구형 휴대폰을 “망치로 쓴다”며 신제품 사달라고 며느리한테 시위하는 시아버지 역할엔 적임자가 따로 있다. 남들은 감추려 하는 백발과 깊은 주름살이 오히려 매력 포인트가 된다는 할아버지·할머니 광고 모델들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노년층은 트렌드의 최전선인 상업 광고에서 접하기 어려운 세대였다. 광고에 나오는 노인들은 대개 보호와 배려가 필요한 존재, 무지하거나 나약한 존재로 표현됐다. 그러나 요즘 광고 속 노년층은 젊은 소비자들을 폭소하게 만들 만큼 유쾌하고 기발하다. 인구 고령화 추세와 맞물려 노인들도 개성을 가진 존재, 소비의 주체로 재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무명이었다가 광고 덕분에 유명해지는 실버 모델들이 탄생하면서 실버 모델을 해보고 싶다는 희망자가 늘고 있다. 모델이 되겠다는 열정과 의지는 젊은 사람 못지않지만, 웬만큼 노력해서는 오디션에 합격하기 어려울 정도로 경쟁이 뜨겁다.

검은머리 염색은 금물

모델 지망생 배옥순씨(62)가 ‘이 바닥’에 뛰어든 것은 지난해 10월이었다. 1남1녀를 모두 결혼시키면서 인생의 ‘숙제’는 얼추 끝냈다. 이제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고 싶었다. “요즘은 나이에 0.7을 곱해야 진짜 자기 나이라고 하잖아.” 이 계산법을 따르면 그는 40대 초반에 불과하다. 40대에 할머니 소리 들으며 집이나 지킨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게다가 피부까지 이렇게 팽팽한데.

전업주부였던 배씨는 제2의 인생을 찾겠다며 실버 취업 박람회장을 방문했다. 딱히 눈에 드는 일자리가 없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실버 모델을 모집한다는 업체를 발견했다. 서초노인종합복지관(02-577-6388)이 노인 일자리를 창출할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S엔터테인먼트’였다. 즉석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대본을 읽었다. 며칠 후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면접에 합격하면서 배씨는 S엔터테인먼트의 일원이 됐다.

그러나 ‘소속사’가 생겼다고 해서 바로 모델로 데뷔하는 것은 아니다. 일단 프로필 사진을 모델 에이전시에 돌려야 한다. 에이전시는 여러 지원자 중에서 광고 성격에 알맞은 후보를 골라 프로덕션으로 보낸다. 프로덕션은 이 중에서 다시 적합한 사람을 선정해 광고대행사와 광고주에게 의사를 타진하고, 이들이 모두 찬성할 때 실제 광고 촬영에 들어간다. 4~5번의 심사를 통과해야 모델 데뷔의 행운을 거머쥐는 셈이다.

절차가 복잡하다보니 모델 지망생들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 지친다. 처음엔 프로덕션에서 “오디션을 보자”는 연락만 와도 기쁘지만, 오디션 낙방이 거듭되면 상처가 커진다. 배씨는 “오디션을 본 후에 며칠씩 기다려도 연락이 안 올 때가 가장 견디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오디션을 10번 봤는데 모두 떨어졌다”며 “그래도 노력하면 언젠가 한 번은 되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지금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치는 실버 모델들은 이 지난한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보험 광고 등을 찍었던 최정윤씨(65·인터뷰 참조)는 “프로필 사진을 들고 찾아갔던 모델 에이전시가 100여곳이 넘는다”며 “모델로 뽑힐 확률은 오디션을 50번 보면 1~2번 될까 말까 하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광고 대행사나 프로덕션의 입맛에 맞게 자신의 외모를 연출하는 일도 쉽지 않다. 우선 얼굴이 너무 잘 생기면 곤란하다. 젊은 연기자들은 예쁘고 잘 생길수록 유리하겠지만 실버 모델은 개성이 더욱 중요하다. 중후함이 묻어나는 반듯한 용모보다 코믹하면서도 소탈한 이미지의 모델이 인기가 좋다. 명색이 ‘실버’ 모델이기 때문에 나이보다 젊어 보여도 안 된다. 희끗희끗 흰머리가 섞여있는 멋스러운 반백의 헤어스타일이 이상적이다. TV에 나오는 실버 모델들이 굳이 검은 머리로 염색을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출연료는 배역의 비중과 계약 조건에 따라 달라진다. 지나가는 단역은 10만원 안팎을 받지만 대사가 있는 메인 모델은 100만~300만원을 받는다. 경쟁 상품의 광고에 나가지 않겠다는 전속 계약을 맺거나 광고의 방영 기간이 6개월을 넘어가면 출연료가 조금 올라갈 수 있다. 그래도 많은 액수는 아니다. 광고 촬영에 걸리는 시간은 억대 출연료를 받는 스타들과 똑같다. 한 번 촬영장에 나가면 6~8시간을 꼼짝없이 매여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실버 모델은 다른 벌이로 생계가 해결되면서도 촬영이 있는 날엔 언제든지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광고모델업계의 틈새 시장

요즘이야 20~30대 소비자를 겨냥하는 이동통신 광고에 노부부가 등장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수 년 전만 해도 실버 모델이 나오는 광고는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건강식품이나 의료기기, 생명보험 정도였다. 이 틀이 깨진 것은 2002년 즈음부터다. 중견 연기자 신구씨가 한 햄버거 광고에서 “니들이 게맛을 알아?”라는 대사를 유행시키면서 실버 모델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할아버지 모델도 젊은 소비자의 시선을 잡아둘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 광고를 기점으로 2002년 상반기에만 실버 모델이 주연을 맡은 TV 광고 3~4편이 전파를 탔다.

‘노인의 재발견’은 유명 연예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는 광고업계의 움직임과도 관련이 있다. KTF의 ‘쇼(SHOW)’ 광고를 맡고 있는 제일기획 김태해 국장은 “유명 연예인들이 그 몸값에 상응하는 광고 효과를 내고 있는가에 대해 업계가 의구심을 갖고 있다”며 “여전히 유명인을 고집하는 광고주도 있지만 신선한 무명 모델을 중심으로 광고를 제작하려는 추세도 분명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광고업계 내부에선 유명 모델의 한계에 대한 문제 제기가 계속돼 왔다. 김상훈(인하대)·안대천(홍익대) 교수가 올해 초 ‘광고학 연구’에 발표한 논문 ‘광고모델시장 선진화 방안에 대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국내 300대 광고주 중 1년 전속 모델료로 5억원 이상을 지불하는 경우는 62%에 달했다. 이들 광고주의 대다수는 모델료가 너무 많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더욱이 유명 모델이 겹치기 출연과 사생활 문제 등으로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주는 경우가 있어 광고주들이 ‘본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광고주와 광고대행사들은 기존 광고에 잘 등장하지 않았던 노·장년층에서 신선한 얼굴을 찾기 시작했다. 중견 탤런트와 연극 배우, 무명의 실버 모델이 대안으로 부상했다. 김 국장은 “무명 모델을 쓸 때 리스크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캐스팅만 좋으면 광고 효과가 (유명인 모델보다) 훨씬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부부 실버 모델이 출연해 “아들아, 우린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했던 ‘쇼’의 TV 광고는 유명인 모델 못지않은 화젯거리를 만들어낸 바 있다.

2006년 데뷔 이후 한 달에 한 편꼴로 광고를 찍어온 김현순씨(63)는 이 같은 흐름의 수혜자로 볼 수 있다. 그는 모델 일에 전혀 뜻이 없던 전업주부였다. 우연한 기회에 어느 에이전시 관계자의 눈에 띄어 실버타운 광고를 찍게 됐다. 온화한 인상과 자연스러운 연기 덕분에 광고 계약이 줄을 이었다. 생명보험과 공기업, 의약품 광고 등 지금까지 출연한 광고가 20편이 넘는다. 무릎에 붙이는 노란색 관절약 광고에서 “계단, 한숨부터 나와요”라고 대사를 읊는 모델이 그다.

물론 누구나 김씨처럼 꾸준히 광고 섭외가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실버 모델 지망자들은 “경쟁자가 많다”며 한숨을 쉬는데, 정작 광고대행사 관계자는 “실버 모델 풀이 많지 않다”고 말한다. 광고대행사가 원하는 ‘바로 그 캐릭터’를 딱 떨어지게 연기한다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얘기다.

이미 데뷔한 선배 실버 모델들은 광고 계약에 연연하기보다 새로운 삶에 도전한다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찾으라고 조언한다. 김씨는 “이 일을 하면서 지금껏 알던 사람들과는 생각이 다른 분들을 많이 만나게 됐다”며 “그것만으로도 참 행복하다”고 했다. 모델 지망자 배씨도 “아직 오디션에 붙지 못했지만 살아가는 목적이 있고 희망이 있어서 좋다”며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2008.07.16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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