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9. 11. 14:33
서울 서초구 서초동 법조건물 지하에 들어선 세종원은 회원제 고급식당이다. 바둑을 즐겨두는 명사들에게는 수담(手談)을 나누는 사랑방으로 더욱 유명하다.

평일 어느때든 둘러봐도 전직 장·차관 서너분을 쉽게 뵙는다. 이 곳을 찾는 장·차관 출신은 축구단을 꾸려도 될 만큼 그 숫자가 많다. 전직 국회의원이나 기업에서 퇴직한 임원들, 프로기사 뺨칠 만한 수준급의 기력을 지닌 언론사 현직 사장도 손이 근질거릴 때마다 나타난다. 사공일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도 청와대에 들어가고 난 다음부터 뜸해서 그렇지, 예전에는 단골고객이었다. 자정을 넘겨가며 진종일 바둑을 두는 커플도 심심찮게 목격된다.

이들 명사가 바둑 삼매경에 빠진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둑 두는 동안에는 마음이 차라리 편하기 때문이다. 퇴직하고 후배들이 마련해준 골프 자리도 한두번하면 발길부터가 내키지 않는다. 산도 오르내리되, 매일 행사처럼 다니기는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다. 이래저래 비슷한 처지의 또래들과 한수 한수 두다보면 위안을 얻는다.

그런데 바둑 두며 나라 걱정하는 것도 가끔 해야 취미생활이지 매일 하려면 고역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고급 인력인데, 국가에 보탬이 되고픈 바람이 왜 없겠는가. 하다못해 낯선 거리를 헤매는 외국인에게 손을 건네고 싶어도 어디 가서 어떻게 신청해야 하는지조차 모른다. 자원봉사도 머릿속에 그려 보지만 도무지 어색하기만 하다. 요즘 중학생이나 고등학생들은 봉사점수를 반드시 챙기게끔 돼 있지만, 이 분들이야 죽기 살기로 공부했고 일에 중독된 채 젊음을 바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봉사도 자라면서 몸에 배야 자연스러운 법이다.

일본 게이오(慶應)대 미타(三田)캠퍼스에는 오랜 전통의 후진카이(婦人會)가 활동하고 있다. 이 대학 출신 가운데 40~70대 연령으로 구성된 부인회는 매주 수요일 오후 외국인들을 상대로 일본어를 가르친다. 별도의 대가를 받지도 않지만, 어려서부터 체화된 봉사의 긍지를 살려 자신들의 모국어를 가르치는데 그리도 열심이다.

우리는 어떤가. 은발을 휘날리며 제자리에서 사회에 기여하고파도 마땅한 공간이 없다.

정부가 해마다 수천억원의 예산을 쏟아붓는 노인 일자리 사업이랬자, 거리 정비나 택배, 세차, 주유원 자리 늘리는 게 고작이다. 이런 일들이 하찮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다. 왕년에 알아주는 예산전문가다, 세제통이다, 국제금융통이다 했는데 그런 경륜과 경험을 고스란히 살릴 방안을 고민하자는 것이다. 예컨대 환율이 가파르게 치솟는데다 최근까지 유가가 급등할 때 중소기업들이 어땠을까 짚어보자. 변변한 자문 한번 하기도 어려운 처지여서 이들 전문가의 도움이 긴요했으리라. 한자 강사나 전통예절 교육, 문화재해설 교육쪽에 자원자들이 넘쳐나고, 그래서 문화 한국의 자긍심을 드높였으면 좋겠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정부가 이들 고급 인력을 국가자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이를 지켜나가는 일에 두팔을 걷어붙여야 한다. 도움을 원하는 쪽에서 어느 분야에 누구 누구가 있고, 또 어떤 쪽에는 누가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고급인력 은행을 만들자. 이 과정에서 돈이 들면 당연히 돈을 써야 한다. 나이든 고급인력의 활용이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또 하나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이들 고급인력이 쉬겠다는데도 굳이 봉사의 공간으로 등을 밀자는 게 아니다. 스스로 국가에 헌신할 의지를 갖고 있음에도 이를 활용하지 못해 초래되는 사회적 손실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일보 2008.09.1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0911010330271610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