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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버스의 추억, 그리고 2008년 추석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9. 12.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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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은 별개의 중력을 지녔다. 명절마다 펼쳐지는 귀성 행렬은 순례와 같은 숭고함이 일상적 노곤함과 결합하는, 마법 같은 의식이다. 귀성 풍경도 시대의 변천과 함께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대한뉴스처럼 우리에게서 사라진, 또는 우리 앞에 새롭게 나타난 추석 고향길의 모습을 담아봤다.
▶역, 터미널 앞 장사진, 남부여대도 역사 속으로
한가위 하면 떠오르는 첫 이미지는 연휴 전부터 역과 버스 터미널을 메운 장사진(長蛇陣). 연휴 몇 달 전부터 길게 늘어선 예매 대기자 행렬은 그 인상이 매우 강렬해서 TV 뉴스의 단골 꼭지로 다뤄졌으며 추석, 민족 대이동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바로미터였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는 대표적인 풍경이 됐다.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예매 시스템이 완비되면서 사라진 것. 이제 대다수의 귀성객은 홈쇼핑을 하거나 영화나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 티켓을 사듯 귀성 승차권을 집에서 예매한다.
혼잡은 귀성 당일도 마찬가지. 모든 티켓을 현장에서 구매해야 했던 시절에는 귀성 당일 다른 승객의 지각으로 급히 반환되거나 취소되는 표를 얻어내기 위해 매표 창구 앞을 서성이던 아버지도 많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역 곳곳에 설치된 무인발권기 덕에 많이 사라졌다.
낯선 풍경도 새로 생겨났다. 녹록지 않은 KTX 티켓 가격을 아끼려 인터넷 관련 카페 등을 통해 낯선 이와 함께 동반석을 구매한 이들이 역 대합실에서 맞선 보듯 인사를 하는 풍경이 간혹 눈에 띈다.
‘남부여대’가 실감날 정도로 그 시절에는 짐도 그렇게 많았다. 커다란 사과나 배 상자부터 정성스레 싼 보자기까지 들고 진 추석 선물이 가득. 아이들 고사리 손에도 뭔가를 들리지 않으면 안됐다. 요새는 택배와 홈쇼핑, 대형마트의 전국 무료 배송 서비스 등이 보편화하면서 고향가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껏해야 기내용 캐리어 정도가 귀성객임을 짐작케할 뿐이다.
‘통일’과 ‘비둘기’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 역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음식 나누는 것은 옛말, 객실 풍경도 변해
객실 풍경도 크게 바뀌었다. KTX 같은 고속열차는커녕 비둘기나 통일호 같은 완행열차가 많았던 그 시절에는 남도로 향하는 귀성객 가운데 길게는 7~10시간씩 기차를 타고 가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바리바리 싸온 짐 가운데는 계란이나 김밥도 있어 긴 시간 무료한 여행길의 동반자가 됐다. 옆 자리에 앉은 다른 일행과 먹을 것을 나눠 먹는가 하면 동향임을 확인하고 벌써부터 고향 얘기꽃을 피우는 훈훈한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귀성길은 마치 인생 여정의 축약판인 듯 사람 냄새로 가득했다. 객실은 그대로 오프라인 채팅룸이 됐다. 귀성길 먹는 재미는 탑승시간 단축과 함께 덜해졌다. 풍경을 바꾼 것은 열차의 고속화와 개인용 디지털 기기의 대중화. DMB 시청권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휴대용 게임기 등 디지털 엔터테인먼트 기기가 보편화하면서 넓은 객실은 조그만 화면을 들여다보는 개개인의 물리적 집약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역과 터미널 구내에 있는 신문과 잡지 가판대는 손님의 발길이 눈에 띄게 줄었다. 이에 따라 설렘이 묻은 기분 좋은 시끌벅적함이 객실 공기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요새는 간혹 큰 소리로 휴대전화 통화를 하는 이의 목소리만이 쩌렁쩌렁 울릴 뿐이다. 심지어 기차나 버스 내에도 영상이나 음향 시설, 전문 잡지가 구비돼 있는 경우가 많아 이런 현상은 더욱 늘었다. 서울역 관계자는 “승객의 옷차림도, 짐도 모두 여행이라도 가듯 가벼워진 것이 눈에 띄는 추세”라고 말했다. 한편 역귀성이 늘면서 서울 각 터미널 대합실에는 또 다른 기다림이 늘었다. 바로 고향에서 추석을 지내러 올라오는 부모를 마중나온 자식 때문. 이 때문에 한산하던 주차장 역시 서울 번호의 차량으로 차고 있다.
▶짧은 연휴, 취업난, 경제난…유난한 2008 추석
물가 급등에 취업난까지 겹친 대학가는 오히려 덜 한산해진 모습이다. 올해의 경우 연휴도 짧은 데다 일자리 없이 집에 가기 민망하고 취업 준비를 손놓기 불안한 심리에 도서관에서 연휴를 보내는 취업준비생이 늘어난 것.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항공대 등 서울 서부지역 대학생이 매년 연합해 마련해온 귀성 버스인 ‘한가위 귀향단’의 경우 지난해에는 1000여 명의 신청자가 몰렸으나 올해는 700여 명만이 신청했다. 보통 20대가 넘었던 전세버스가 10여 대로 크게 줄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도 연휴가 짧아 가족 단위보다는 아버지나 어머니 등 한두 명만 귀성하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직장인 김모(29) 씨는 “연휴도 짧고 해서 예년과 달리 일주일 전에 아버지만 고향에 다녀오셨다”고 말했다.
날짜도 이른 데다 이상고온 현상으로 여름을 연상케 하는 요즘 날씨도 올 추석을 낯설게 하고 있다. 강석중(42) 씨는 “차창 밖 풍경만 봐도 가을 풍모가 물씬 풍겨 마음이 설랬는데 올해는 실감이 덜 난다”고 말했다.

http://www.heraldbiz.com/SITE/data/html_dir/2008/09/12/200809120002.a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