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장기요양보험/기타

노인장기요양보험 체험수기 당선작 - 장기요양보험! 우리가족의 큰 버팀목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9. 4. 18:50
장려상 - 변묘숙

장기요양보험! 우리가족의 큰 버팀목

결혼 생활 20여년 넘게 나름대로 산 다고 살았지만 또래의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아무것도 내세울 것도 없고  별 자랑거리도 없는 처지지만 그래도 팔순의 부모님이 건재하고 계신다는 점은 힘주어 자랑할만한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몸이 약하신 어머니께서 소소한 병으로 간혹 의원을 찾긴 하셨지만 아버지는 건강하셨고 팔순의 연세가 무색하리만큼 청년 같은 기운으로 집뒤 야산에 텃밭도 가꾸셔서 식구들에게 무공해 야채며 과일을 철철이 공급해 주셨다.

아버지께서 농사를 지어 택배로 보내주시면 그 품목이 그 무엇이든지 간에 이웃들과 조금씩이라도 나눠 먹었던 것은 이웃간의 정이 각별했다기 보다 내심 건강한 팔순의 아버지를 자랑하고 싶어서 였다.

그렇게 자타가 공인하는 얼짱 몸짱 아버지셨기에 나를 비롯한 그 어느 누구도 아버지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리라는 것을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2년 전 겨울막바지 어느 저녁 무렵 친정어머니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믿을 수 없었다.

며칠째 내렸던 비가 그치자 오후에 산책을 나가셨는데 저녁 늦게 까지 돌아오지 않아 온 동네를 찾아 헤메다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서 의식을 잃고 계시는 아버지를 찾아 병원으로 모셨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계신다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일까.

정신을 차릴수록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먹던 저녁밥을 그대로 던져 놓고 울며 울며 3시간 거리를 달려 병원에 도착했다.

우리 사남매를 키우시느라 삼촌 고모들 공부시키랴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을 봉양하시느라 자신의 몫을 평생 유보하고 사셨던 아버지의 곤하셨던 삶이 떠올라 눈물이 절로 흘러 내렸다.

모진 비바람과 폭풍이 지나면 꽃피고 봄이 올줄 알았는데 그 봄일 수도 있는 부모님의 회혼, 장조카의 결혼이 바로 닿아 있는데 아버지가 저렇게 허망하게 쓰러지시다니 .

의식이 사라질 때 까지 얼마나 몸부림을 쳐셨을까 온몸이 가시에 긁힌 흔적이 역역했다.

아 !

아버지, 아버지.

큰 소리로 부르면 아버지가 여기가 어디지 하고 깨어나실 것 만 같아 나는 아버지를 큰 소리로 불렀다.

 조금만 더 일찍 발견해서 병원으로 모시고 오셨다면 혈전 용해제를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늦게 이송된 바람에 치료시기를 놓쳤다는 의사선생의 말씀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그 자체였다.

흔한 휴대폰 하나 사드리리 못했던 나의 무심함, 그리고 아버지께서 복용하시는 혈압 약만 믿고 적절하게 조치 취해드리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이 오늘 아버지를 이지경에 이르게 했다는 결론은 헤어날 수 없는 괴로움 이였다.

소위 간호사로서 현직에 근무하면서 아버지께 경동맥 초음파나 심장 초음파 한번 챙겨 드리지 못한 점은 가슴을 치고 통탄할 일이였다.

뇌혈관을 막고 있는 혈전이 터져 버리면 목숨마저 위험하단 말을 듣고 자청해서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며 아버지께서 다시 한번 이 역경을 이겨 내실 것을 기도했다.

아버지께서는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통스런 시간을 잘 인내하셨다.

갖가지 검사와 치료에 따르는 아버지의 고통을 생각하면 아버지 침상을 지키는 우리의 피곤 함쯤은 내비칠 것도 없었다.

입원실로 옮겨 가신 첫날부터 며칠간은 아버지는 몸부림을 치면서 화장실에 직접가시길 원하셔서 우리는 아버지를 부축해서 화장실로 모셨으나 그때가 마지 막이였는지 우려했던 혈전이 터져 뇌출혈로 다시 한번 사경을 헤메시게 되었다.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셨지만 모진 병은 아버지로부터 오른쪽 팔다리의 기능과 언어를 빼앗아 가버렸다.

신체적 장애는 누구든 아버지를 도와 불편함을 들어 드릴 수 있는 부분이지만 언어기능의 소실은 아버지도 우리도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절망적인 상실 이였다.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살아오면서 아버지는 나의 정신적인 멘토셨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내 일상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시간 이였는데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은 울고 울어도 받아 들일 수 없는 깊은 슬픔이었다.

작은 기쁨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크게 부풀려 축하해주셨던 아버지셨다.

아무리 말을 하려고 해도 뚜.뚜.뚜 밖에 나오지 않은 말 앞에 아버지는 또 얼마나 큰 절망감을 느끼실까.

건강하셨을 때 맛있는 음식이나 좋은 곳 구경 한번 제대로 시켜드리지 못했다는 회한이 앞서지만 가족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희생하셨던 아버지께 지금이야 말로 그 은공을 되갚을 때라는 것을 모두 알고 가족이 합심하여 아버지를 최선을 다해 모시자고 말했다.

어머니를 비롯해 모든 가족이 병원을 오가며 아버지를 정성껏 간호해드렸 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족들은 지쳐 갔다.

팔순이 넘은 어머니도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상황에 어머니마저 몸져눕게 된다면 큰일이라 간병인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어쨌든 아버지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금전적인 문제는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지만 날이 갈수록 이점 또한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각자의 가정도 꾸려 가느라 버거운 형편에 누구하나 선뜻 간병비를 내 놓을 처지가 못되었다.

병원비는 보험이 적용되는 관계로 그럭저럭 해결할 수가 있었지만 200만원에 가까운 간병비를 달마다 지급해야 하는 문제는 가족들의 큰 고충 이였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집이라도 팔아서 기꺼이 지불해야 할 돈이지만 하루 이틀 한달 두 달 한해 두해만 생각할 사안이 아니라 우리의 고민은 깊어만  갔다.

경제적으로 넉넉하다면 언제까지라도 개인 간병인을 두고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싶었지만 자식 된 도리도 못하면서 그 돈마저도 흔쾌히 내 놓을 수 없는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졌다.

일년을 그렇게 버티고 나자 두 분이 마련해 두었던 노후자금은 동이 나버렸다. 어쩔 수 없이 그 비용을 자식들이 충당해야 할 일이였다.

일년 즈음에 경제적인 문제가 지친 몸보다 더 가중한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오자 형제들은 드러내놓고 말은 하지 않아도 다들 형편에 버거운 돈을 언제까지고 아버지의 간병비로 지불해야만 한다면 평소에 느끼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의 감정 그대로를 유지할수 있을까 의문을 가지는 듯 보였다.

사람들은 그래서 긴병에 효자 없더란 말을 하면서 점점 부모로부터 멀어져 가는 자신을 합리화 하는가 보다 나 역시 예외일수 있겠나 싶어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뇌졸중 부모 십년 간병에 자식 넷 다 심장병이 났다더라.’

‘부모가 암 진단을 받고 투병을 하게 되면 정 없이 살던 형제자매가 뭉쳐지지만 중풍에는 화기애애하던 형제자매가 다 원수가 되더라.’란 소리가 남의 얘기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솔직히 두려움이 앞섰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어도 형제간 우애 하나 만큼은 남달랐는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누구 보다 아버지께서 정말 괴로워하실 것 같았다.

캄캄한 터널에 오도 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갇혀 버린 듯한 우리 가족에게 일년전 시행된 장기 요양보험은 한줄기 구원의 빛으로 다가왔다.

간병비와 병원비를 포함해 매월300만원 가까이 지출해야만 했던 비용이 50만원으로 줄어 든 것이다.

장기 요양이 필요한 환자나 가족에게는 정말 혁명에 버금가는 제도가 아닐 수 없었다.

경제적인 문제가 사랑의 앞자리를 가로 막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고 몸과 마음만 앞세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 만성질환을 앓고 계시는 분들의 돌봄에 많은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한숨을 돌렸지만 막상 아버지를 너싱홈에 모셔 두고 나오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시설과 제도가 좋아도 노인들은 자신이 거처했던 집에서 살고 싶어 하신다란 이야기를 직장 연수로 떠난 일본요양시설 관계자로부터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께 충분히 말씀을 드렸다.

비록 아버지를 이곳에 모셨지만 우리는 한순간이라도 아버지를 잊고 살지 않을 것이라고 날마다 홈으로 어머니도 오실 거고 나 역시 일주일 내지 늦어도 이주일 만에 꼭 아버지를 찾아 올 것이라고 손가락을 걸어 약속을 했다.

약속이 필요 없는 천륜으로서의 의무지만 주중엔 직장인으로서의 고단함과 주말엔 차로 왕복6-7시간 걸리는 멀다면 먼 거리를 달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그 약속을 2년 넘도록 지금까지  지켜나갈수 있는 것은 사랑만으로 결코 행할 수 없는 어렵고 힘든 돌봄의 길에 장기요양보험이라는 사회적인 제도가 동행을 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요양보험이라는 버팀목에 기대어 가족의 사랑을 지켜나갈수 있음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이번 주말에 아버지를 뵈러 가면-  2년 가까이 주말마다 아버지 문병을 열심히 다니면서 요양시설에 계시는 아버지를 위해 세상 돌아가는 얘기는 많이 해드렸지만 본인이 말씀을 못하시기에 정작 물어 보고 싶어도 물어 볼수 없는 어쩌면 아버지께서 가장 궁금해 하실지도 모르고 가장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실 -요양비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해드려야 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새로산 파란 티셔츠를 아버지께 입혀 드리고 요양원의 작은 정원으로 모셔나가서 장기요양보험 덕분으로 언제까지고 아버지를 편안하게 모실수 있다는 것을 상세히 설명해 드릴 것이다.

내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떡거리실 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버지! 

주말에 뵙겠습니다.


자료출처 : http://cafe362.daum.net/_c21_/bbs_list?grpid=1DsO9&fldid=Fc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