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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면 건강해질 수 있을까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9. 3. 11:34
#1 중소기업 사장인 김모(45)씨는 작년부터 물 맛에 푹 빠졌다. 김씨의 사무실과 집 냉장고엔 노르웨이 탄산수, 자작나무 수액, 해양심층수라고 적힌 생수들로 가득하다. 백화점 생수매장에서 일주일에 70~80병씩, 매주 20만~30만원을 물 사는데 쓴다. 물만 잘 마시면 암을 비롯한 질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외국 서적을 접한 후부터다. 물과 사랑에 빠진 김씨는 지난 8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복용하던 비타민, 홍삼도 끊어버렸다.
그는 "주위에서 명품 물 중독자라고 비아냥대지만, 물을 바꾼 뒤 몸이 훨씬 좋아졌다는 것을 느낀다. 아픈 뒤 병원비 내는 것보다 좋은 물로 병을 예방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2 15년째 당뇨병을 앓고 있는 이민정(55·가명)씨. 최근엔 증세가 심해져 시력도 떨어지고, 발이 썩는 당뇨발 위험성이 높다는 진단까지 받았다.
겁도 나고 무서운 생각까지 들 무렵, 미용실에 들렀다 탁자에 놓인 '고혈압·당뇨병, ○○○이온수로 말끔히 고칠 수 있다'는 광고 전단지를 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220만원을 주고 당장 집에 설치했고, 밥 짓고 세수하는 것도 모두 이 물을 이용했다. 그때부터 자가 혈당체크도 안 했고, 약도 먹지 않았다. 약을 끊은 지 20일 후 쇼크로 쓰러진 이씨는 응급실로 실려갔다. 의사는 "치료를 위해 의사가 처방한 약보다 효능 검증도 안된 물을 더 믿는 환자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 깨끗한 물, 건강에 좋은 물, 병 치료하는 물?
물이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역사만큼 오래됐다. 세계 어느 곳을 가든 '신비한 물' '약수(藥水)' '젊음을 되찾아 주는 샘물'이 있다. 대개는 그냥 물이지만, 어떤 물은 물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야생동물의 생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면 동물들도 병에 걸리거나 다쳤을 때 특별한 샘물을 찾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물 분자의 모양은 온도 등에 따라 달라지는데 그 중 '육각수(六角水)'가 몸에 좋다는 학자의 저서가 나온 적도 있었고, 일본의 한 대체의학 전문가는 물에 음악을 들려주면 결정(結晶)이 바뀐다는 주장을 내놓아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물의 신비함을 믿고 싶은 이런 욕망은 마케팅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수만 년 전 형성된 빙하가 녹은 물을 담아 한 병에 몇 만원씩에 파는가 하면, 해양심층수, 암반수 등 이런저런 물들이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각종 미네랄이 섞인 '건강수(水)' '치료용 물'까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수돗물에 대한 우려를 덜어주겠다던 정수기 업체들도 초기에는 '깨끗한 물'을 자랑했으나, 요즘은 '건강에 좋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사람에 따라 살찌고 마른 것, 수명의 길고 짧음은 마시는 물에 그 원인이 있다"는 동의보감의 품수론(品水論)까지 인용되고 있다.
■ 의사들 "물은 물일 뿐"
의사들의 입장은 그러나 "물은 물일 뿐, 건강에 특별히 좋은 물은 없다"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유해물질이 없는 깨끗한 물이 몸에 가장 좋다는 것. 더럽지만 않으면 몸 속에서 다 똑같다는 것이 현대 의학의 정설이다.
이 때문에 이른바 기능성 물 시장이 급성장하는 현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한 서울대 의대의 한 교수는 "물의 의학적 효능이 명확히 밝혀진 게 뭐가 있나. 물을 판매하려는 사람들의 장삿속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단단히 속고 있다"는 강한 비판을 내놓았다. 물이 몸 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맞지만, '더 좋은 물'이 건강에 더 많은 역할을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설명이다. 어느 쪽이 맞는 것일까?
■ 좋은 물도 기준이 있다?
의학적으로 좋은 물의 첫째 조건은 '인체에 해로운 병원균이 없고 깨끗한 것'이다. 또 항산화 물질의 활동을 돕고 음식의 분해, 소화, 흡수를 높이는 약 알칼리성(PH 7.5 정도)이 산성화된 물보다 좋은 것으로 본다. 몸 속에 들어가서 수분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
좀 구체적인 풀이도 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좋은 물을 이렇게 규정한다. ▲무색·무취 ▲온도 8~14도 ▲PH 중성 또는 6~7의 약알칼리성 ▲과망간산칼륨 함유량 2㎎/L 이하 ▲염소이온 12㎎/L 이하 ▲경도(硬度·물에 칼슘과 마그네슘이 함유돼 있는 정도: 물의 세기) 100㎎/L 이하 ▲증발 잔류물 40~100㎎/L 이하 ▲유해성분(중금속, 농약 등)이 없을 것 ▲미네랄 성분이 100㎎/L 정도 함유된 것 등이다.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긴 하지만 좋은 물의 공통점은 유해물질이 없고 깨끗해야 하며, 약알칼리 성질 등이다. 물 속 미네랄 성분의 있고 없고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르다.
■ 미네랄 성분 많으면 좋은 물인가
물 논쟁의 핵심이 물 속에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미네랄이다. 해양심층수 등 기능성 물을 시판 중인 기업들은 "미네랄 성분이 충분히 포함된 것이 좋은 물"이라고 주장한다. 물을 마시면서 아울러 인체에 필수적인 미네랄까지 공급해주기 때문이란 것이다. 칼슘, 마그네슘 등 몸에 꼭 필요한 미네랄은 체내 생성이 안 되므로 식품을 통해 섭취해야 하는데,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미네랄을 물을 통해 손쉽게 보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의료계 등에서는 물에 함유된 미네랄은 영양분으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한 무기 미네랄로 인체에 들어와도 흡수가 잘 되지 않으므로 굳이 미네랄이 많이 든 물을 마실 필요는 없다고 지적한다. 물만 마셔도 미네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는 주장은 대부분 과장됐다는 설명이다.
■ 마시면 건강해질 수 있을까?
보통 성인 남성은 하루 칼슘 약 1g, 마그네슘 200~300㎎이 필요하다. 시판 중인 미네랄 워터엔 1L당 칼슘 20~80㎎, 마그네슘은 20~40㎎씩 들어 있으므로 물만으로 미네랄을 섭취하려면 하루 10L(큰 페트병 6개 반) 이상 마셔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인체가 필요한 미네랄은 대부분 식품으로 섭취 가능하며, 굳이 부족한 미네랄을 보충하고 싶으면 종합비타민 한 알 정도를 먹는 것이 더 낫지, '배 터지도록' 미네랄 워터를 마실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물 논쟁의 정답은 아직도 없다. 물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프랑스의 과학자 자크 벤베니스트는 1987년 물을 이용한 질병 치료의 한 분야인 '동종요법'의 원리를 실증하는 실험을 했다. 자크는 그 결과를 영국의 권위 있는 과학잡지 '네이처'에 투고했다. 네이처 편집진은 1년이 지난 뒤에 이 논문을 게재하면서 이런 글을 덧붙였다.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실험으로 물리학적인 근거가 없다.'
물의 특별한 효능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할만한 근거가 없다는 현대 과학(의학)의 입장을 네이처가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우리나라 보건 당국은 한 가지 물, 즉 '알칼리 이온수'에 대해서는 효과를 인정하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수소 이온농도(PH) 8.5~10까지의 알칼리 이온수가 '소화불량, 만성설사, 위장 내 이상발효, 위산 과다' 등 4개 질환의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 도움말=안윤옥 서울대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 박샛별 아주대의대 가정의학과 교수, 송미연 경희대 동서신의학병원 한방재활의학과 교수, 김현원 연세대의대 생화학교실 교수, 유제강 웅진코웨이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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