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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너무 기쁜 한글날! 존경하는 세종대왕 업적은?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10. 9. 15:42
'한글'을 멋지게 창조해 주신 세종대왕의 업적을 되새기며, 세종대왕께서 우리 국민에게 남겨주신 위대한 선물을 소개한다.
다음은 포털사이트 '다음'과'야후'에 소개된 세종대왕의 업적이다.
즉위 및 유교적 지배체제의 확립 1408년(태종 8) 충녕군에 봉해지고, 1412년 충녕대군에 진봉되었다. 당시 왕세자는 형인 양녕대군이었으나, 태종은 충녕이 왕위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1418년 6월 세자로 책봉했다. 같은해 8월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했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강화를 바탕으로 유교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의정부의 권한을 제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태종 때 실시된 6조직계제를 이어받아 국정을 직접 관장했다. 세종은 승정원의 기능을 강화해 실제적으로는 이를 통해 모든 정무를 통괄했다.
1420년 설치된 집현전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육성하는 동시에, 왕과 세자에 대한 학문적인 자문·교육과 각종 학술연구·서적편찬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성삼문·박팽년·하위지·신숙주·정인지 등 집현전을 통해 배출된 학자들은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와 문화를 확립하는 데 주역이 되었다.
유교적인 의례를 확립하기 위해 예조·의례상정소,집현전에서 국가의 의례인 오례,사서의 관혼상제에 관한 사례등에 대한 중국의 옛 제도를 연구하게 해 이를 정리했다. 이와 함께 1419년 사사노비의 정리를 시작으로, 1424년 불교의 종파를 정리해,각 종파별 18개의 사찰만을 인정했다.
제도의 정비 세종이 재위한 15세기 전반기는 유교를 치국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체제, 즉 군현제가 정비·확립되는 시기였다. 따라서 세종은 그의 치세 동안 태종이 이룩해 놓은 지방통치체제의 기반을 계승하면서 토호적 향리를 제거하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해 행정력을 중앙에 집중시키기 위한 수령육기법과 부민고소금지법의 실시, 도와 군현 구획의 부분적 개편, 임내의 정비, 양계 신설주진의 개척에 따른 구획과 사민입거 및 유향소의 복설, 경재소의 효율적인 운용 등 지방통치면에서 획기적인 치적을 남겼다.
이와 더불어 관리의 등용·녹봉 체계를 고치고, 관리등용제도로는 과거제도 이외에 취재제도를 실시해 지방의 수령,이서,·문음 출신자 등에 대한 선발기준을 마련했다. 또한 형벌제도를 개혁하여 가혹한 고문으로 피심문자가 죽는 일이 없도록 했으며, 죽을 죄에 해당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삼심을 받게 하는 삼복법을 시행했다. 1444년에는 노비를 노주가 마음대로 벌주지 못하도록 하고 위반한 자는 처벌하게 했다.
경제정책 세종은 국가의 수입을 증대하고 민산을 안정시키기 위해 농업기술을 발전시키고 조세제도를 개혁했다. 정초에게 명하여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이는 삼남지방의 농업관행을 기초로 우리나라의 풍토에 맞는 농법을 보급하려 한 것이었다.또한 세종대에는 농업 재생산력의 보존과 사회안정책의 일환으로 진휼정책이 가장 빈번하게 시행되기도 했다.
조세제도의 개혁에서 가장 큰 업적은 공법의 제정이었다. 세종은 1444년 공법을 시행했으며 여기에서는 풍흉과 토지비옥도의 차이에 따라 각각 9등급과 6등급으로 나누어 세액의 차이를 두는 연분9등법,·전분6등법을 실시해 조세의 공평을 도모했다. 이때의 세율은 과전법에서의 1/10에서 1/20로 감소되었지만, 토지가 비옥한 삼남지방이 대부분 높은 등급으로 책정되었으므로 국고수입은 크게 증가했다. 농민의 경우는 결당 기준 세액이 300두에서 400두로 늘어나 세율의 인하만큼 부담이 줄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전주나 관리의 자의적 중간수탈이 배제되어 그 부담이 어느 정도 경감되었다.
대외정책 세종의 대외정책은 태조 이래의 명에 대한 사대와 왜·여진 등에 대한 교린이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치적·경제적인 안정과 국력의 축적을 바탕으로 대명외교에서는 처녀진헌과 금은조공을 폐지하는 등 불합리하고 무리한 명의 요구를 거절했다. 한편 고려말 이래 골칫거리였던 여진과 왜에 대해서는 정벌을 단행했다. 여진에 대해서는 김종서,최윤덕으로 하여금 두만강·압록강 유역의 여진을 몰아내게 하고 6진,·4군을 설치, 이곳에 남쪽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왜에 대해서도 1419년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으나, 1423년 삼포를 개항하면서 회유책도 병행했다. 그러나 왜인의 출입이 증가하자 이를 통제할 목적으로 1443년 계해조약을 맺어 세견선과 세사미 양을 각각 50척과 200섬으로 제한했다.
문화의 발달과 훈민정음의 창제 세종대에는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문화가 크게 융성했다. 집현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학문연구와 각종 편찬사업을 비롯하여 음악·미술 등 예술활동이 활발했다. 특히 훈민정음의 완성과 반포는 이 시기 문화유산의 결정이라 할 만하다. 1428년 이후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간행사업은 '고려사','고려사절요','자치통감훈의' 등의 역사서를 비롯해 '삼강행실도'와 같은 유교경전과 유교윤리에 관한 서적,'운회언역','용비어천가'등 훈민정음이나 음운·언해 관계 서적,'팔도지리지','조선전도','세종실록' 등의 지리서 등 다양한 범위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편찬사업은 국가의 기틀을 확고히 하고 유교정치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과학기술의 발달 세종대에는 과학기술도 크게 발달했다. 천문기상 부문에서는 1434년 천체관측시설인 '간의대'가 준공되었다. 이곳에 설치된 '혼천의','혼상','규표' 등 천문관측기기는 송·원의 과학기술의 영향과 고려 때까지의 우리나라 천문과학의 유산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괄목할 만한 것으로 해시계,물시계,·측우기의 발명을 들 수 있다.
세종대에 이루어진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인쇄술의 발달이다. 즉위초부터 새로운 금속활자 인쇄기술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던 세종은 경자자,갑인자,병진자 등을 주조하는 데 성공했다.화포의 주조기술과 화약 제조기술도 단순한 중국기술의 모방에서 벗어나 크게 발전했다. 천자화포,지자화포 등 새로운 화포를 개발했으며,총통등록을 편찬하여 화포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을 상세히 기록하고 정확한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했다.
세종의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는 영릉이며, 시호는 장헌이다.
리뷰스타 2008.10.09 14:01
http://media.paran.com/snews/newsview.php?dirnews=2517180&year=2008&pg=2&date=20081009&dir=385&mode=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