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 승강대라도 낮으면 좋으련만 정류장 플랫폼에서 올라서기가 김 할머니에겐 등산하듯 힘에 부친다. 젊은 사람들도 승강대에 무릎을 자주 찧는다는 말을 듣고 난 뒤에는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김 할머니는 “눈까지 침침해 버스 노선도가 잘 안보이다 보니 주위에 묻기 일쑤인데 불친절한 젊은이라도 만나면 참 난감하다”며 “집 밖을 나서면 사서 고생”이라고 말했다.
#2. 최근 금융기관에 문의할 것이 고객센터에 전화를 건 박모(72세, 서울 홍제동) 할아버지는 전화기와 사투를 벌였다. 자동응답(ARS)시스템의 안내 멘트가 너무 빠른데다 버튼까지 잘못 눌러 같은 메시지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듣느라 곤욕을 치렀다.
이렇게 5분을 허비한 양 할아버지는 결국 해당 부문의 상담원과 전화연결을 하지 못한 채 전화기를 내려놓아야 했다. “상담전화가 몰려 전화를 다시 걸어 달라”는 기계음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왔기 때문이다. 양 할아버지는 “차라리 업체로 직접 찾아가는 게 낫겠다”고 푸념했다.
우리사회의 소수자였던 노년층이 다수자로 자리를 옮겨가고 있다. 하지만 사회 시스템은 대세인 고령화를 발 빠르게 따라가지 못해 노년세대의 불편을 더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노인들이 겪고 있는 신체적 노화에 대한 사회구조적인 배려부터 부족하다.
생활 속에서 노인의 이동권을 제약하는 버스 정류장의 플랫폼과 버스 승강대의 단차를 비롯해 인도 곳곳에 불법주차를 막기 위해 설치된 볼라드도 노인들의 안전한 나들이를 막는 장애요소가 되고 있다.
고령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절에 설치된 사회 인프라들은 최근 서울, 경기 등 일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저상버스가 도입되고, 지하철과 건물, 도로 등에 장애를 없앤(barrier-free)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 도시디자인 차원에서 경쟁적으로 채택되면서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지만, 여전히 걸음마 단계이다.
젊은층 위주 사회인프라…“외출도 겁나”
고령화시대 ‘노인 전문의’도 없어…“일상불편사”
사회 인프라의 부족보다 노인들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불편들이다.
노인관련 비정부기구(NGO)인 한국은퇴자협회는 대표적 사례로 ARS서비스와 함께 신용카드 뒷면의 깨알 같은 글씨를 꼽았다.
카드 뒷면에는 사용안내문구와 고객만족센터, 분실신고 전화번고가 기재돼 있어 이용약관을 읽기 힘든 노인들에게는 더욱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음에도 무용지물이었다.
은퇴협이 실제 시중의 신용카드를 수거해 확인해 본 결과, 카드 뒷면의 글씨는 4~6포인트 크기로 깨알같이 적혀 있는데다 앞면의 카드번호를 나타내기 위한 굴곡까지 겹쳐 노년층이 돋보기를 쓰고 봐도 알아보기 힘든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명룡 한국은퇴자협회장은 “약관 글씨의 크기는 공정거래위원회의 경고조치로 2005년 이후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정작 그보다 더 중요한 신용카드 뒷면의 글자는 아직도 깨알 그대로”라며 “한국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경제적 기준은 젊은 층에게 맞춰져 있다”고 비판했다.
의료계 일각에서는 소아과는 있는데 노인과가 없는 현실도 고령화 시대에 걸맞지 않게 노인의 불편을 키우는 단면이라고 지적한다. 일부 노인 관련 의학회를 중심으로 노인병 인정의가 배출되고 있지만, 전문의제 도입은 의료계 내부에서도 필요성을 놓고 갑론을박을 거듭하고 있다.
울산대의대 이영수 교수는 지난 달 노인과학학술단체연합회 주최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노인병 전문의 양성 등을 통해 노인 개인과 가족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고 일갈했다.
엑티브에이징 대세…고용은 미미
사회계층 간 노인 이해도 상반돼
노인인구의 증가는 몸이 불편한 노인은 물론 건강한 노인도 크게 양산하고 있다.
의학의 발달에 따른 건강수명의 연장으로 활동적인 노후, 이른바 액티브 에이징(active aging)은 우리사회의 화두가 된 지 오래이다.
그러나 현재의 사회시스템은 활동적인 노후를 뒷받침하기는커녕 노인에게 불합리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은퇴자협회 등 여러 노인 단체들은 사회 내부적으로 연령차별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다고 말한다.
노인일자리 박람회를 통해 나타난 65세 이상 노인에 대한 미고용 풍조와 금융기관의 대출 불이익은 서민층 노인들에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는 반응이다
최근에는 최저임금법 개정을 둘러 싼 논란도 가세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법의 개정 여부가 액티브 에이징의 척도가 될 노인 일자리와 상관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김성조 의원이 국회에 제출한 최저임금법 개정안에는 60세 이상 고령자에 대한 최저임금 감액적용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이에 대해 시민단체인 참여연대는 “60세 이상 고령자에 대한 최저임금 감액적용은 연령차별에 해당한다”며 “취약계층에 대한 고용기회를 확대하려면 최저임금 감액적용이 아닌 고령자 채용기업에 대한 지원 제도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이 같은 반응은 지난 달 한국경영자총협회가 우리나라 기업의 절반 이상은 55세 이상 고령자의 최저임금을 깎으면 이들 계층을 추가로 채용할 뜻이 있고, 79.6%의 기업이 “고령자의 최저임금을 감액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응답한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증폭됐다. 한나라당의 개정안이 재계의 입장만 반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령인력의 활용을 적극 주장해 온 은퇴자협회 등 노인관련 단체들은 시민단체와 견해를 달리 하고 있다. “현재 실시되고 있는 일률적인 최저임금제가 고령층에게 오히려 취업의 기업을 제한하고 있다”며 “고령층에겐 임금의 차등을 둬 이들이 적은 임금에서도 경쟁력을 갖고 취업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최저임금제의 연령별 차등적용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노인 일자리를 두고도 사회 계층 간 이해가 미세하게 엇갈리고 있는 셈이다. 서울의 한 사회복지 전문가는 “고령자에 대한 최저임금 감액적용을 두고 나뉜 계층 간 이해에서 엿볼 수 있듯 노년세대는 우리사회에서 클럽샌드위치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문제는 정부정책 후순위?
‘3老법안’ 생각하면 ‘부글부글’
사회복지 전문가들은 종국적으로 사회시스템을 만드는 정부의 정책과제에서 고령자 정책이 늘 후순위로 밀려 나 있는데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폐지를 검토한 것만으로도 노년세대에 대한 정부의 고려가 어느 정도인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노인단체의 반발과 사회 각계의 지적 속에 대통령직속기구였던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폐지는 면했지만, 보건복지가족부 산하로 편입되면서 위상이 크게 격하됐다.
뿐만 아니라 3노(老)법안이라 일컫는 국민연금법과 기초노령연금법, 장기요양보험법은 노년세대의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노인관련단체들은 불안한 국민연금법의 개혁과 용돈 수준도 안 되는 기초노령연금법의 현실화를 정부에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지만, 전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올 7월 장기요양보험법이 시행되면서 노인보건복지에 새 시대가 열렸다는 기대가 커졌지만, 시행 6개월도 안 돼 갖은 수급 대상자 범위와 공공성 상실 등의 문제로 사회 각계의 직격탄을 맞고 있어 이를 바라보는 노년층의 시선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보건복지부 수장을 지낸 차흥봉 한림대 명예교수도 지난 달 열린 노년학회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재정 안정성을 고려하더라도 수급 대상자를 3% 수준으로 정한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며 현 장기요양보험제에 일침을 가했다.
노인을 위한 사회변화 ‘꿈틀’
인프라 구축·인식전환 날갯짓
이 같은 총체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물밑에서는 노년세대를 이해하고 이들의 사회적 불편을 해소하려는 다양한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다.
정부가 정보화 기술을 활용해 보건의료의 새 지평을 열고자 추진하고 있는 ‘U-케어 서비스’는 노인 취약계층을 직접적인 타깃으로 시범사업이 진행되고 있고, 지방자치단체들은 신도시 설계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하며 사회 인프라를 고령자와 장애인, 여성 중심으로 새롭게 정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사회생활 전반에서 주목받고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의 경우 고령자와 장애인이 일상생활을 안전하고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생활환경을 만드는 개념에서 출발해 이제 성별과 연령, 국적, 문화적 배경, 장애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과 사용 환경을 만드는 디자인으로 발상이 확대됐다”고 말한다.
일부 대학과 노인회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노인생애체험센터에 설치된 시설들이 유니버설 디자인의 올바른 적용이고, 여기에 사회 지도층을 포함한 각계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등 노년세대에 대한 관심은 예전과 비할 데 없이 달라지고 있다.
대한노인회 서울시연합회의 황은영 사회복지사는 “노인생애체험센터를 찾기 위한 방문자가 고령친화산업 및 사회복지시설 종사자 뿐 아니라 학생과 주부 등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며 달라지고 있는 사회 분위기를 전했다.
실버케어뉴스 2008.12.05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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