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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장기요양보험/기타

노인장기요양보험 체험수기 당선작 - 아버님, 우리 아버님....

장려상 - 최선희

아버님, 우리 아버님....

나는 젊은 날 애들 아빠를 만나 소위 연애결혼이라는 것을 했다.  외아들에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은 당시로서는 그리 내세울만한 결혼 조건은 아니었다.  사랑을 하면 콩깍지가 낀다고 했던가 우리는 결혼을 해서 지금까지 아들 하나  딸 하나  낳아 키우면서 잘살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청혼을 쉽게 승낙한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사랑도 있었지만  그 사람 아버님에 대한 믿음도 많은 작용을 했다.

  처음 인사드리던 날,   평생 직업군인이셨다는 그 사람 아버지를 뵙기 전까지 긴장했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소를 머금지 않을 수 없다.   내 주변에서는 군생활을 오래 하신 분이 없었던 터라 군인하면  딱딱하고 무섭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몇일 전부터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님을 뵙는 순간 내 걱정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인자하신 모습이 말로 형형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순간부터 외며느리에 대한 아버님의 사랑은 끝이 없으셨다. 

   아버님은  65세가 넘으실 때까지도 하프마라톤을 뛸 정도로 건강하셨다.  어머님과 아이들도 건강하였고 가족 모두가 각자의 몫을 다하고 있어 아무런 걱정 없이 주위의 부러움 속에 20여년을 생활했다.   그러나.....

   2004년 치매진단을 받고 현재 투병중이신 아버님은 올해로 76세가 되셨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그리도 이뻐하던 손자도 알아보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만 계신다. 

사람이 태어나 늙고 병들면 대부분 일정한 고통의 시기가 있기 마련이고 이 기간에는 자식들이 부모를 보살피는게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이지 않았던가.   효(孝) 특히 늙으신 부모에 대한 수발을 드는 것을  당연한 순리로 여기면서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핵가족이라는 현실에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남편과 나의 직장이 지방에 있는 관계로 가까이서 수발을 들지 못했고 그 몫은 고스라니 어머님께 돌아 갔다.   점점 사라져 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어 하셨던 아버님은 유치원 생들도 하지 않는 놀이를 당신의 마지막 종교인 것 처럼 집중하셨다.

가끔 뵐 때마다 다른 사람처럼 변해가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가족에 대해 사랑으로 가득차 있던 당신 얼굴엔 때뭍지 않은 미소년의 모습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미 대․소변은 받아 내신지 오래고 점점 아버님은 어린아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버님의 얼굴이 해맑은 소년의 모습으로 변하면 그 만큼 어머님의 무릎에는 고통이 가중되었고 남편과 나의 가슴엔 눈물 고이는 시간이 늘어만 갔다.  평소 효를 인간이 지녀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남편에게는 고통스러움이 더 했으리라 생각한다.

  서울 집에 갈 때마다 남편과 나는 어머님께 간청했다.  아버님 모시고 시골로 가시자고....그러면 우리 어머님은 당신께서 힘이 남아 있는한 자식들 곁에 가지 않겠다고 완강하시다.  어머님께서 내려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이유는 서울에 친구들이 많이 있어서 내려가면 친구들 보고 싶어서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님이 우리에게 짐이 될까봐 그러신다는 것을 잘 안다.  

요즘 전화 할 때 친구들 만나러 나가지 않았냐고 하면 ‘이젠 나이가 들어서 만날 친구도 그리 많지 않다’ 하신다.   그 목소리엔 외로움과 간병의 고단함이 묻어 나온다.  그래도 우리는 자식으로서 힘이 되어드리지 못했다.   매일 전화로 안부만 물을 뿐 우리는 자식으로서 하나도 해드리지 못했다.  남편이 눈물이 보이는 때가 잦아 졌다.  그만큼 불효에 대한 죄스러움이 깊다는 뜻일게다.

  그런데 어느해이던가 작은 희망의 소식이 들렸다.   어르신께 수발서비스를 하는 제도가 생기기에 앞어 전국 몇 개 지역에서 시범사업을 한다는 것이었다.   마음속으로 아버님이 계시는 서울에도 빨리 시범사업이 실시되어 혜택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그러나 서울은 시범사업을 하는 지역이 한 곳도 없었다.  전국 방방곡곡에 사업이 실시되어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몇 해가 더 필요하다고 했다.  그 때까지 아버님이 버텨줄 수 있을까.  어머님 무릎은 그 때까지 견뎌낼 수 있을까.  안타까운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2008.7.1.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실시 되었다.   제도 실시 전 인정신청을 해서 1등급을 받아 급여개시와 함께 서비스를 받고 계신다.

  하루에 몇시간 와서 제공해주는 서비스지만 우리집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24시간 집밖에 나가시지 못하던 어머님께서 요양보호사가 와 있는 시간에는 외출을 하시어 병원에도 다녀오시고 뒷동네 골목시장에도 다녀오시고 친구분들도 만나고 들어오신다.  중년의 요양보호사는 자식들 보다도 더 살갑게 어머님과 어버님을 대해주신다. 그래서 남편은 직접 요양보호사와 통화하여 아버님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다. 또한 아버님 건강뿐만이 아니라 어머님의 건강상태까지 확인하고 있다. 이보다 더 좋은 제도가 어디 있겠는가.  어머니는 늦게 새로운 자식을 하나 뒀다고 기뻐하신다.   그럴 때면 한 없이 고개숙여지고 죄송하지만 아니 더 죄송스러울지라도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실시가 된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열명의 자식이 있으면 무엇하겠는가. 옛말에 구부러진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가까이서 부모를 모시고 사는 자식이 최고의 효자가 아닌가.  그러나 현대처럼 전통 가족제도가 붕괴된 지금 불효의 멍에로부터 우리 자식을 구한것이 노인장기요양보험이라 생각한다.   시행된지 1년여 밖에 되지 않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해서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조금 부족한 것이 있다해도 좀 더 완벽한 제도의 탄생을 위해 많은 기대를 품고 나는 기다릴 것이다. 

  우리집에 희망을 갖다 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의 실시를 환영하면서 일선에서 수고하는 공단직원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자료출처 : http://cafe362.daum.net/_c21_/bbs_list?grpid=1DsO9&fldid=Fc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