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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학


‘수불석권(手不釋卷)’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늘 공부한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오나라 왕 손권이 배우지 못한 대장 여몽에게 전쟁터에서도 독서를 권했다는 삼국지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공부에 게을리하지 말라’는 충고는 너무 많이 들어서 말의 윤기마저 사라진 듯하다. 그럼에도 권학(勸學)은 성현의 가르침으로 흔들림이 없는 것 같다. 그만큼 학업에 정진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뜻으로도 들린다. 특히 기억력이 떨어지고, 삶의 의지마저 약해지는 노인들에게는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학도 이야기가 종종 세간의 이목을 끄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만학의 상징’을 꼽으라면 조선말 문장가 박문규를 빼놓을 수 없다. 1887년 83세 나이로 개성별시문과(開城別試文科)에 합격해 ‘최고령 과거 급제’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40대에 공부를 시작했고, 40여년간 수만편의 시를 외워 근체시(近體詩) 권위자로 인정을 받았다. 아홉번 장원급제 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으로 불린 이율곡이나, 7개 국어에 능통했던 신숙주 등 천재형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박문규의 만학은 또다른 감동을 자아낸다. 고종도 향학열에 감동해 종2품 문무관 자리를 2년여 만에 제수했다고 한다.

이해인 수녀의 어머니도 팔순때 만학의 시를 썼다고 한다. “육십여년 긴긴 세월, 따져보면 짧은 세월/완고하신 부모만나, 배울 기회 놓쳤지만/어쩌다 그 긴 세월, 허송으로 보내왔나/이제라도 늦지 않다, 마음먹기 달렸거늘/…(중략)/이제라도 배우는 게, 남은 여생 보람일세”

만학의 꿈을 키워 온 조재구 할머니가 77세의 나이로  수능시험을 치른다는 소식이다. 서울지역 최고령 응시자라고 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유교적 가풍 탓에 진학을 못했고, 남편이 세상을 뜬 후 우울증까지 왔다고 한다. “내 인생을 찾고 싶다”며 공부를 결심했을 때 이미 70대였다는 것이다. 현대판 만학의 상징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노인일수록 뇌를 자주 사용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한다. 시인 서정주는 치매에 걸릴까 두려워 하루에 한 개씩 산 이름을 외웠다고 한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즐겁지 아니한가.’ 공자 말씀이 만학의 깊은 뜻을 웅변한다.

<박성수 논설위원>

경향신문  2009.11.11 17:42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11111740435&code=99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