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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도 뿔난다


▲ 시인 신경림
‘엄마가 뿔났다’라는 텔레비전 드라 마가 한참 인구에 회자된 일이 있다.그중에서도 노인의 사랑 이야기가 단연 화제였다.“아하,노인도 사랑의 감정을 가졌고 사랑을 할 줄도 아는구나!”라는 다 아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 대목이 말하자면 이 드라마의 절창이었다.실제로 우리 문학에서 노인의 사랑의 감정이 표현된 것은 역사가 오래여서,가령 신라 때의 향가 ‘노인 헌화가’에도 “짙붉은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하고 나오지만,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그러한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노인은 감정도 없고 능력도 없고 힘도 없는,우리 사회의 짐만 되는 존재라는 인식이 크게 퍼져 있다는 뜻이다.몇 해 전 한 선거를 앞두고 여당의 대표라는 사람이 노인들은 투표장에 나오지 말고 그냥 집에 계시라는 뜻의 말을 했다가 크게 곤욕을 치른 일이 있지만,이야말로 노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얼마나 심한가를 잘 보여주는 예다.노인이 보편적으로 보수적이어서 한 말이겠지만 이 말 속에 들어 있는 노인 폄하의 생각은 당하는 사람들로서는 그냥 넘기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결코 노인을 홀대하는 나라는 아니다.전철이나 버스를 타면 노인석이 지정되어 있고 게다가 전철은 아예 공짜다.새로 탈 노인을 위하여 젊은이들은 노인석이 비어 있어도 앉지 않는다.극장은 할인을 해주고 미술관이나 박물관은 곳에 따라 무료다.65세 이상 노인의 전체 인구의 60%는 매월 8만원가량의 노령연금을 받으며 의료에서도 많은 혜택이 주어진다.이만하면 노인을 위한 천국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그러나 막상 한국에서의 노인의 삶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사회에 팽배해 있는 뿌리깊은 편견이 그 원인이다.일정한 나이에 이른 사람이면 그 개인차에도 불구하고 아무 쓸모도 없고 아무 능력도 없는,생각도 감정도 없는 존재로 취급한다.마침내 함께 대화를 하지 않으려 하고 함께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노인이 가는 찻집이 따로 있고,젊은이가 가는 술집이 따로 있다.어쩌다 노인이 젊은이가 다니는 술집엘 잘못 들렀다가 입장을 거부당하는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이것이 너무 심하다 보니 외국을 다니다가 노소 차별 없이 어울리는 것을 보면 오히려 부자연스럽고 망측한 생각까지 든다.

늙었다고 해서 지혜로운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은 서경에 나온다.이 말은 뒤집어서,비록 늙은이의 말이라도 지혜로우면 들어야 한다는 소리로 해석할 수 있다.늙은이 가운데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노인처럼 84일 동안이나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도 결코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도 있고,투르게네프가 산문시 ‘노인’에서 충고한 바대로,그대로 몸을 오므리고 자기의 회상 속으로 들어가 아직도 생생한 푸름과 애무와 봄의 힘을 가지고 사는 사려깊은 사람도 있다.경제적으로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옛날에 비슷한 어려움을 이겨낸 사람들의 지혜를 오직 늙은이의 말이라 해서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가 타당하게 들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근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노인 등의 최저임금을 법정 이하로 내리겠다는(비록 양해를 얻어서라는 단서가 붙지만) 궁색한 발상마저 나오는 것 같다.이것도 연령차별로서 있을 수 없는 얘기겠지만,더 중요한 것은 노인을 공경의 대상 또는 도움의 대상으로만 여기지 말자는 것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지식이나 경험이 우리 사회에 아직 유용하다면 더 활용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위해서도,그들을 위해서도 옳은 일이다.공경의 대상이 되는 것도,동정의 대상이 되는 것도 노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함께 얘기하고 함께 일하면서 함께 사는 것만이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뿔나는 것은 엄마만이 아니다.

시인 신경림

서울신문  2008.12.24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1224030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