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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장기요양보험/기타

노인장기요양보험 체험수기 당선작 - 지못미가 아닌 보못미

최우수상 -  권미경

‘지못미’가 아닌 ‘보못미’

요즘 우리나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합니다.)”란 말을 만들어 서로 안타까움을 이야기한다. 허나 5년 전부터 우리 가족은 “보못미(보내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란 말로 지금까지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3녀 1남을 둔 엄마가 2005년 3월 5일 새벽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그때 연세가 66세셨다. 쓰러져 있는 엄마를 너무 늦게 발견한 탓일까? 1년을 꽉 채워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의식 없는 상태로 지금까지 5년째다.

1급 등급판정을 받은 엄마는 올해 3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인 재가보호서비스를 받고 있다. 그 덕에 무겁고 크기만 했던 간병비의 부담에서 벗어나 엄마를 돌보고 있다. 더 일찍 이 제도를 알았지만, 엄마 같은 환자에게 환경 변화는 큰 모험이자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 필요했다. 그래서 꽤 많은 돈이 들었지만, 4년을 넘게 해왔던 개인 간병인의 간병 환경을 그리 쉽게 바꾸지 못했다.

허나, 많은 우여곡절 끝에 방문요양과 방문간호를 신청했던 우리의 결정은, 지금 엄마와 가족들 모두에게 정말 잘한 일이 되었다. 또 이 제도가 오랫동안 아픈 병자와 그 병자를 돌보는 가족에게 얼마나 큰 위안과 위로가 되는지 꼭 말하고 싶다.

  엄마가 쓰러지던 당시 부모님이 가진 거라곤 결혼 안 한 막내아들과 같이 살던 집 한 채뿐이었다. 병원 생활이 시작된 때부터 아빠와 우리 4형제의 생활은 엄마의 치료에 집중되었다. 월급도 병원비에 먼저 써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결혼한 딸들도 맞벌이였고, 지금은 퇴직하셨지만 작년까지 직장에 다니셨던 아빠까지 모두 일을 하고 있던 터라 5년이란 시간을 엄마와 같이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병원에서 첫 한 달 만에 천만 원이 넘는 병원비가 결제되었다. 수술비, 주사, 간병비, 병실료, 기타 등등, 우리에겐 처음부터 현금결제밖엔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 시대의 어머니들이 거의 그러시겠지만 우리 엄마 또한 아빠와 함께 시장에서 장사하시며 자식 넷을 키우시느라 자신을 위해서 보험 하나를 들어놓지 못하셨다. 자식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는 들어드리고 싶었지만, 고혈압 진단을 받아 혈압 약을 15년 넘게 드시는 상태라 가입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형제들 각자 그동안 모아놓은 비자금과 적금을 모아 첫 달 치 병원비 천만 원을 해결하고 앞으로의 일을 계획해야 했다. 엄마의 상태가 쉽게 호전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수술하고 한 달이 지난 4월 5일, 정확히 한 달째 되는 날 엄마는 또다시 중환자실로 들어가셨다. 그날 병원에서 연락을 받고 가보니 엄마는 몸을 새우처럼 꼬부리고, 온몸은 빨갛고, 침대가 흔들릴 정도로 심한 경련을 하고 계셨다. 원인은 약물 부작용! 중환자실로 들어가 모든 약을 끊고, 다시 하나씩 약을 투여해 어떤 약이 부작용을 일으켰는지를 찾아냈다. 목 기관을 절개하고 커다란 산소 호흡기를 달았다.

수술 첫날엔 머리 두개골을 잘라 수술하고, 한 달 뒤엔 목의 기관을 절개해 기구를 끼우고, 1년 후 퇴원하기 한 달 전엔 얇은 관을 콧속에 넣어 위까지 닿게 해서 식사를 하게 했던 ‘콧줄’을 빼고, 위 부분을 배 바깥쪽에서 뚫어 호스를 연결해 식사하는 줄을 달았다. 엄마의 고통을 보며 우린 한없이 후회의 눈물을 흘려야 했고, 엄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힘들어해야 했다.

  처음 엄마가 쓰러져 병원에 왔을 때 우리는 수술하지 않고 그냥 하늘나라로 보내드려야만 했었다. CT사진 결과 뇌 속이 거의 검은색이었다. 피가 너무 많이 고여 있었고, 수술하지 않고 그냥 놔두면 3~4시간이면 돌아가신다고 했다.

  그때 아빠가 눈물을 흘리며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애들아, 엄마 그냥 보내드리자. 생전 엄마의 소원이었다. 혹시 쓰러지면 수술하지 말아달라고…… 수술했는데 못 깨어나면 어쩌냐. 깨어나도 반신불수가 되어 힘들고 아파하면 어떻게 하니. 늦게 엄마를 발견한 아빠의 책임이 크다. 내가 그 죄를 다 받을 테니 엄마 그냥 보내드리자. 응? 애들아!”
  아빠의 말씀이 맞았다. 허나 어찌 엄마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만 볼 수 있겠는가? 우린 의학의 힘과 기적을 믿었다. 엄마만을 생각했더라면 주무시는 것처럼 편안했던 모습 그대로 보내드렸어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는 엄마가 아닌 우리 자신을 생각했다.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보내드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날 우리는 엄마의 삶 중에 가장 큰 짐을 지워드렸다.

  평생 힘드신 삶을 사셨는데 죽음이라도 편안히 해드렸어야 했는데…… 얼마나 힘들고 괴로우실까? 너무너무 죄송했다. “엄마, 미안해요. 아프게 해서 너무 미안해. 편안히 보내드리지 못해 미안해요.”

  우리는 의사에게 ‘지금 엄마한테 가장 편안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의사는 산소 호흡기를 달아드리는 거라고 했다. 그 장비는 중환자실밖엔 없었다. 그 후 한 달을 중환자실에서 보내고 일반 병실에서 꼬박 1년을 보냈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엄마를 돌보면서 생각하는 것이 엄마의 편안함이다. 살아 계셔도 편안하게, 혹 돌아가신다 해도 편안하길 기도한다.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의식 없는 상태지만 더는 아프지 않길 간절히 소원한다.

  그리고 우린 짧게 끝날 것 같지 않은 이 긴 병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한 형제당 100만 원씩, 직장이 조금 나은 둘째언니가 150만 원. 합해서 450만 원과 아빠의 월급에서 기저귀 값이며 잡비 50만 원. 한 달에 500만 원을 모아 병원비와 간병비를 해결해 나갔다. 서로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다. 보통 사람들처럼 회사 다니면서 받은 월급으로 시부모님 모시고, 은행 대출금 갚고, 또 다음 달 월급 간절히 기다리며 열심히들 살아왔다. 그런데 엄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먹는 거, 입는 거, 가끔 가족과 다니던 나들이도 줄여가며 엄마를 보살펴야 했다.

  이렇게 모아온 병원비가 1년이 지나 퇴원할 때쯤 계산해보니 7천여만 원이 넘었다. 형부들과 남편의 이해와 지원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아프지만, 우리 엄마는 사위들 복은 엄청 받으셨다. 이 돈이 건강하셔서 받는 용돈이었다면 얼마나 신나셨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원에 낸 돈이라니 아쉽고 아깝다.

  이젠 더 이상 환자에게 해줄 게 없으니 나가라는 병원 측의 퇴원 통보를 받고 우리는 또 결정을 해야 했다. 잘못된 결정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우린 신중을 기했다. 시설로 보내드려야 할까? 아니면, 집으로? 어느 누구에게 들어보지도, 어느 누가 이렇게 했다는 경험담도 들을 수 없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 하는 이 막막함과 답답함! 엄마를 어떻게 해야 하나…… 두려웠다.

  쉽게 시설을 택하지 못했던 것은 엄마의 예민함 때문이었다. 중환자실에서 한 달 만에 엉덩이에 욕창이 걸려 나와 지금까지도 애쓰고 있는 부분이다. 또 병원식 식사가 맞지 않아 5개월을 거의 매일 설사를 하셨다. 그 5개월 동안 간병인 다섯 명이 힘들다며 모두 그만뒀다. 급기야 몸이 너무 부어서 열 번가량을 바늘로 찔러야 겨우 혈관을 찾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해 7월 새로 만난 간병인 아주머니의 조언으로 병원식이 아닌 고영양식 식사(죽)로 대체하고, 주사 없이 식사 영양만으로 간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꼬박 24시간 전문 간병인이 엄마 한 사람을 돌보기에도 벅찬데 환자 4~5명을 1인 간병인이 돌보는 시설로 보낸다는 것은 곧 돌아가시라는 걸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죽기까지 엄마가 받을 고통이었다. 또 그 상황을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우리 역시도 그 고통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다.

  엄마를 간병하던 아주머니에게 가정 간병을 부탁해보았다. 20년 넘게 간병인 생활을 해왔던 경험 많은 간병인이었다. 건강하실 때보다 몸무게가 두 배나 무거워진 엄마를 번쩍 들어 휠체어에 앉게 한 분이다. 우린 그날을 잊지 못한다. 다 나은 것처럼 눈을 힘 있게 뜨고 휠체어에 앉아 있던 엄마. 환자를 위해서라면 힘든 게 없었던 아주머니였다.

그분의 승낙으로 시설이 아닌 집으로 엄마를 모시는 일이 결정되었다. 너무 다행스러웠다. 그분을 만나 엄마가 얼마나 편안해하시는지, 엄마는 설사도 열도 없이 반년을 그분의 간병을 받았다. 허나 일주일에 50만 원. 한 달이면 200만 원에서 250만 원 하는 간병인비와 25만 원의 약품과 약값, 15만 원의 식사(죽), 기저귀 등등. 한 달에 300만 원의 비용이 지출되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1년이 지나자 또 다른 선택을 해야 할 만큼 큰 부담이었다.

  세 딸과 아빠가 50만 원씩 200만 원의 간병인비를 책임지고, 남동생은 월급을 다 털어 나머지 금액을 매워나갔다. 5주가 되는 달이면 간병인비를 한 주 추가해 내는 남동생의 웃음 섞인 한숨을 듣곤 했다. 병원에서의 생활보다는 절반이 줄었다고 다행이라 하기엔 4년의 세월은 너무 길었다.

  그래도 너무나도 감사한 것은 그 누구도 엄마를 어찌 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4년을 지내는 동안 갑자기 열이 나서 1년에 한두 번씩 입원하기도 했다. 그때도 ‘왜 병원에 모시고 갔냐?’고 말하는 형제는 아무도 없었다. 입원하셨단 소식에 일산에서, 안산에서, 의정부에서 모두들 직장 끝나고 9시, 10시가 되는 시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간병인 아주머니가 자신의 집에 갔다 오는 주말이면 4형제가 한 주씩 돌아가며 토요일에서 일요일까지 꼬박 하루를 밤새 간병하고 다음 날 출근했다.

  특히 엄마같이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는 스스로 가래를 뱉지 못한다. 가래를 제때 안 뽑아주면 제대로 호흡할 수가 없다. 유난히 가래 때문에 기침을 많이 하는 터라 자주 썩션(가래 뽑는 행위)을 해야 했다. 주말에 엄마를 간병하고 돌아가는 길은 꼬박 밤을 샌 탓에 녹초가 되었다. 특히 초기에는 약물치료 탓에 설사를 자주 해 수시로 대소변을 치워야 했기에 가족들 고생이 더 심했다.

  굳이 누가 자식이며 누가 사위인지를 따지지 않았다! 또 누가 내 부모고, 누가 네 부모인가를 애써 구분하지도 않았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가족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자랑하고 싶다. 이들은 내가 마음 깊이 존경하는 남편, 그리고 내 존경하는 가족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우리 가족의 경제가 작년 말부터 나라의 경기 침체의 원인으로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빠는 연세가 많다는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고, 불경기로 회사 사정이 어렵게 된 큰형부의 월급이 몇 달이 밀리더니 한 달간 무급휴가가 결정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간병인 아주머니까지 그만두겠다고 하셨다. 어떤 수를 쓰더라도 간병엔 지장 없이 하겠다는 언니의 결정에도 맘이 편치 않았는데 아주머니까지 그만두신다니 참으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처음 가정 간병을 시작할 때 간병인 아주머니에게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부탁드린다 했지만, 우리 엄마가 5년을 넘기실 줄 아주머니도 모르셨을 것이다. 4년 반이라는 시간을 토요일 하루 겨우 집에 다녀오시는 걸로 엄마를 돌보는 일에 애쓰셨는데, 그분 또한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 자신의 가정도 자신의 몸도 잘 돌보지 않고 엄마를 간병했던 아주머니에게 우리 엄마를 계속 부탁하는 건 욕심이었다.

  또다시 숙제가 던져졌다. 새로운 간병인을 구하는 것은 생각지 않았다. 그 간병인 아주머니처럼 해줄 사람을 찾을 수 없을 듯했다. 엄마의 몸에 있는 기구를 간호사처럼 능숙하게 교체할 수 있었던 분이었다. 더 큰 문제는 개인 간병인을 둘 만큼 더 이상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 이젠 정말 시설로 보내드려야 할 때인가 보다.’ 우린 단호한 맘으로 시설을 알아보았다.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남양주시 별내면에 위치한 ‘노인의 집’ 원장님의 소개로 노인요양센터를 방문해 상담했다. 시설을 이용하면 돈이 적게 들었다. 엄마가 잘 계실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갔던 길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발걸음이 무겁고 착잡한 심정이었다.

  지금까지 우린, 우리가 엄마를 시설로 안 보내드렸다고 생각했다. 허나 시설에 가보니 엄마가 계실만한 시설이 없었던 것이다. 엄마처럼 손이 많이 가는 환자를 간병할 곳도, 항상 산소통을 끼고 있어야 하는 병실도, 수시로 기침할 때마다 가래를 뽑아줘야 하는 기계도 없었다. 시설에 맡기기엔 엄마가 너무 중환자였다.

  ‘아, 갈 곳이 없구나.’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더 이상 돈이 없어 시설에 보내드려야 한다는 마음의 죄책감에서 해방된 것 같아 결정된 것은 없어도 맘은 편했다.

이제 남은 것은 노인요양병원뿐이었다. 허나 1년 넘게 병원 삶을 살아온 우리로서는 병원이 너무 싫었다. 엄마도 도저히 적응을 못 하실 게 뻔했다. 다른 방법은 없을까? 고민하던 중 ‘노인의 집’ 원장님이 재가보호서비스를 제안해주셨다. 이런 방법도 있으니 제도를 이용해보는 것도 좋을 거라 하셨다.

  24시간 간병인의 간병을 받던 엄마를 4~5시간의 재가서비스만으로 제대로 모실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병원으로 보내드리자는 형제도 있었다. ‘그만 하자.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내가 엄마라면 하루라도 빨리 그만 살고 하늘나라로 가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엄마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왔던 첫째 언니와 아빠가 병원만은 안 된다고 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까지 최선을 다 해보자.” “잘못 보살펴도 돌아가시고, 병원에 가셔도 돌아가신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번 해보자!”라고 했다.

4년을 했는데도 또 해보자는 용기를 내는 그들이 참으로 위대해 보였다.

  기관에 재가서비스를 신청하고 방문요양, 방문간호를 신청했다. 개인 간병을 할 때보다 60%나 감소된 돈으로 간병이 가능했다. 그러나 처음 요양보호사는 경험이 꽤 있었지만 며칠 후 그만뒀다. ‘그럼 그렇지!’ 다음에 오신 요양보호사 아주머니는 연세가 있어 보였다. 처음 뵈던 날 엄마의 간병을 순서대로 설명하고 난 뒤 나는 “우리 엄마 보시니 어떠세요? 힘드실 것 같으면 지금 말씀해 주세요. 엄마가 손이 자꾸 바뀌면 더 예민해지시거든요.”라고 얘기했다. 그분은 “어찌 하루 만에 다 알겠냐”며 해보겠노라 하셨다.

그때가 올 3월! 처음엔 엄마도 낯설고 적응하기 힘들어했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 너무 안정되고 편안해지셨다. 낮 시간 동안은 요양보호사 아주머니가 돌봐주시는데 틈틈이 찬양도 불러주시고 기도도 해주신다.

  저녁이 되면 아빠와 가족들이 엄마 곁을 지킨다. 병원 생활 1년 동안 엄마 불쌍하다며 손만 만지고 다니시던 아빠가 이젠 우리보다 엄마를 더 잘 간병하신다. “오늘은 물 조금만 드려라, 주스도 드려야 한다. 엄마 추워하신다, 이불 덮어 드려라…….” 아직도 우린 주말마다 한 달에 한 번씩 엄마를 간병하러 간다. 그 또한 어느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5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말이다.

  각자 부담했던 돈이 처음엔 100여만 원에서 50만 원으로, 이젠 더 적은 돈으로 엄마를 돌볼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돈의 액수는 줄었지만 엄마를 향한 사랑과 부모라는 대상에게 드리는 감사는 해가 갈수록 더해간다. 이젠 점점 엄마에게서 아빠에게로 마음의 무게가 실린다. 당신이 엄마를 돌봐야 한다는,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짐을 덜어주겠다는 책임감으로 휘어가는 등이 너무 가슴 저리다. 더 늦기 전에 아빠에게도 자유를 드리고 싶은데…….

누가 나에게 1억이 넘는, 어찌 보면 집 한 채 값을 엄마에게 쏟아 붓는 이유를 묻는다면, 또 요양시설로 보내면 쉬운데 왜 어렵고 힘들게 사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내 엄마가 우릴 쉽고 편하게 키우시질 않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엄마를 그리 간단히 대할 수 있는가!”라고.

  우리 형제는 엄마에게 신앙을 물려받았다. 세상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삶에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면서 자식에게 신앙을 물려준 엄마께 너무 감사한다. 또한 이 일로 하나님이 우리 가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았다. 엄마가 가족 품에 있을 수 있도록, 가족은 엄마를 곁에서 돌볼 수 있도록 우애로 단결하게 해주셨고, 돌보는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경제를 지켜주셨다. 또한 재가서비스의 길을 열어주셨다.

  그동안 엄마가 아프면서 우리가 잃은 것은 돈! 뿐이다. 하지만 5년 전 우리 형제들이 살던 모습보다 지금이 더 나으면 나았지 더 어렵게 사는 형제는 하나도 없다. 놀랍지 않은가? 잃었는데 정작 잃은 게 없다. 우리 자신도 가끔 놀란다. 그렇다면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돈으로도 못 사는 형제들의 돈독해진 우애이고 서로에 대한 존경심이다. 이들 모두가 얼마나 멋진가? 그리고 두 번째로 얻은 것은 엄마 아프시던 그해에 생긴 네 살배기 내 딸이다. 또 얻은 것은 남동생의 결혼! 작년에 좋은 여인과 결혼하여 딸을 낳아, 며칠 전 조카 백일을 축하했다. 또 부모를 가슴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아프고 힘든 이웃을 위로할 줄 아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엄마의 고통이 당신만의 고통으로 끝난 것이 아닌, 우리 가족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감사가 되는지 모른다. 엄마의 고통은 엄마를 아는 모든 사람을 위한 ‘거룩한 고통’이었던 것이다.

  인생이라는 길을 가다 보면 항상 갈림길이 있다. 바로 선택의 순간이다.

엄마가 쓰러지신 날 새벽, 한걸음에 응급실로 달려간 후 몇 분 안에 내려야 했던 수술 선택이 그러했고, 1년 후 병원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서 집으로 모실 때도 그랬다. 그때마다 우리는 항상 선택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있다. ‘무엇이, 어떤 방법이 엄마를 가장 편안하게 해드릴까’였다.

물론 선택의 결과는 여전히 우리를 힘들게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은 건, 과연 ‘지금 누가 가장 힘든가?’라는 물음 때문이었다.

그렇다. 이 순간 가장 힘든 사람은 누가 뭐래도 바로 사랑하는 우리 엄마였다.

  수년간 함께했던 간병인이 그만둬 더 이상 어찌해볼 방법이 없어 막막할 때, 이젠 끝이라고, 더 이상 길이 없다고 했을 때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를 만났다. 정말 이 제도는 한 생명을 정성으로 보살피고 싶었지만, 너무 힘들고 지쳐 더 이상 돌볼 수 없다 생각했던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선물해준 도구였다.

  아빠는 재가서비스를 받아 보니 여러 기관과 연결된 제도 속에서 새로운 정보도 교류하고, 더 개선된 의료 기구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 간병하기가 점점 더 수월해진다고 말씀하셨다. 환자를 마음으로 돌보는 요양보호사 아주머니와 엄마에게 맞는 간호를 적절히 해주는 방문 간호사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들을 파견한 기관에도 또 이런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기까지 많은 수고를 한 사람들에게도 감사하고 싶다. 하나의 제도를 만들고,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여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그래도 사람이 사람을 배려하는, 사람이 사람을 살리려는 끝없는 노력이 이 사회를 좀 더 따뜻하게 하는 것 같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월급에서 건강보험료와 요양보험료가 빠져나갈 때 “나한테는 필요 없는데 쓸데없이 돈이 빠져나간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언젠가 우리와 같은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그때야 비로소 국민건강보험제도의 든든함과 더 나아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에 대한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최근에 대법원 판결로 안락사를 인정하게 되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환자는 편안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리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린 엄마가 건강하게 일어나 우리를 부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요즘 엄마가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보면 엄마가 우리 곁에 계셔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얼굴도 보고 손도 만질 수 있어 감사하고, 비록 대답은 들을 수 없지만 “엄마!”라고 소리쳐 부를 수 있어 감사하다. 항상 초점 없는 눈이지만 마음으로는 우릴 보고 계시다는 걸 안다.

힘이 닿는 한 엄마와 함께하고 싶고, 최대한 편안하게 모시고 싶다.

이젠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를 통해 그것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엄마와 같은 환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들 모두 오늘도 평안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