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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실버관련/기타

연하장, 남보다 한 발 앞서 보내라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편지 쓰기 좋은 계절이 가을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수 없다. 보도 위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보면서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는 찬 바람을 맞으며 홀로 걸으면 누구든지 회상에 잠기고 추억에 젖어든다. 이때 잊고 지내던 누군가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면, 그래서 갑자기 정을 나누고 싶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정서가 아주 메마른 사람이 아니라면 이 상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들 수는 없다. 한동안 교감이 없던 사람에게 어느날 불쑥 전화를 거는 것은 아무래도 생뚱맞다. 전화는 상대에게 피할 틈이나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고 곧장 밀고 들어가는 직접 매체다. 이런 땐 음성보다 문자, 전화보다 편지가 보내는 쪽이나 받는 쪽 모두에게 편안하고 안전하다.

그래도 대개의 사람들은 가을이 다 지나도록 편지쓰기를 실천에 옮기지 못한다. 그러면서 “세월이 또 이렇게 흘러만 가나”하고 아쉬워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편지를 또 한 번 쓸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바로 연말 연하장이다.

연하장을 그저 의례적인 것, 겉치레와 같은 것으로 간주해 무심코 넘겨버리는 사람은 사회 생활에서 성공할 확률이 낮다고 보면 된다. 직장인의 인맥관리법, 성공한 최고경영자(CEO)의 조언과 같은 책에 보면 연하장 한 장으로 상대의 마음을 사고 감동을 주면서 거래를 성사시킨 수많은 사례가 나와 있다.

연하장은 보내는 대상에 제한이 없다. 누구라도 보내서 즐겁고, 받아서 기쁘다. 그 중에서도 평소 감사한 마음이 있지만 제대로 인사말을 못한 동료나 선배, 딱히 친하지는 않아도 인연의 끈을 놓고 싶지는 않은 모임의 멤버, 몇 달 동안 소식이 없어 궁금하지만 갑자기 전화하기는 어색한 친구에게 특히 좋은 통신수단이다.

연하장을 주고받는 풍습은 서양에서도 일찍부터 있어 왔지만 특히 유별난 곳이 일본이다. 일본의 우체국은 매년 1월 1일 아침 대대적인 ‘원단(元旦) 배달’ 작전에 나선다. 연하장을 미리 받아 두었다가 새해 첫날 배달해 주는 것이다. 요즘은 이메일로 새해 인사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아져 1인당 보내는 연하장이 평균 14통꼴밖에 안되지만 2004년까지만 해도 1인당 37통을 보냈다는 통계가 있다(오대영·닛폰리포트).

설날 배달제도가 없는 우리나라에서 연하장은 되도록 일찍 보내야 가치가 높다. 처음 도착한 연하장을 곧장 휴지통에 버리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연말이 되어 한꺼번에 밀려든 연하장은 대접이 달라진다. 제대로 뜯어보지도 않고 책상 위에 쌓아 두었다가 한꺼번에 처분하는 사람도 적지않다. 애써 보낸 정성이 소용없게 되는 것이다.

우정사업본부가 연말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11월 초에 연하장을 발행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연말을 준비하라는 취지다.

이번에 나온 2010년 연하장은 경인년 호랑이해를 맞아 그려진 수채화 호랑이와 복된 새해를 기원하는 복주머니 등으로 디자인됐다. 고급형 3종은 1000원, 일반형 7종과 청소년용 2종은 650원이다. 연하엽서는 320원이다.

우정사업본부의 연하장은 우표값을 포함하고 있어 별도의 우편요금을 낼 필요가 없다. 별도로 우표를 붙여야 하는 민간의 연하장과 비교하면 이중으로 유리한 셈이다. 그런데도 연하장 수요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정사업본부가 올해 발행한 연하장은 714만장. 2007년까지 한 해 1000만장을 발행했으나 지난해 882만장, 올해 또다시 줄인 것이다. 그 전까지는 발행하기만 하면 모두 팔렸으나 최근 들어 팔리지 않고 남는 물량이 생기기 시작한 때문이다.

연하장 발행 물량이 줄었다는 것은 아쉬운 현상이긴 하지만 연하장 이용자에게 무조건 나쁜 소식만은 아니다. 공급이 줄면 가치는 그만큼 높아진다. 남들이 휴대전화 문자를 보낼 때 정성이 담긴 반듯한 연하장 한 통 보내 감동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우체국 문을 두드리면 된다.

이종탁 경향신문 사회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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