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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웰빙정보/노인성질환

'초기 치매노인, 화분 키우면 도움돼요'


원예치료, 약물치료 병행땐 효과 입증
시공간 인지 - 언어능력 눈에 띄게 개선
정서적 안정감 줘 대인관계도 좋아져

“햇빛 덜 보게 하고 물을 많이 주고 비료 좀 주면 잘 크지.”

평소 말이 거의 없는 이달생(81) 할머니는 배추 키우는 얘기만 나오면 생기가 돈다. “화분에 심은 배추 종자에서 싹이 트고 잎이 나는 게 대견스럽다”고 말한다.

경북 영천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8남매를 키운 이 할머니는 4년 전 치매 증세가 나타났다. 올 8월 경기 고양시 일산의 한 뇌신경계 질환 전문병원에 입원해 치매 치료를 받고 있다.

이 할머니는 약물치료와 원예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병실 한쪽에는 이 할머니가 키우는 배추, 쪽파 화분 3, 4개가 늘어서 있다.

이 할머니의 간병인은 “할머니가 처음 입원했을 때는 질문에 정확히 대답하지 못하고 기억도 못해 자신감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며 “식물을 키우면서 ‘내가 키우니까 죽은 것도 다시 살아난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을 회복하고 운동을 하려는 의지도 보인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고향에서 배추와 무를 키웠는데 여기서 오랜만에 키우려니까 힘들다”며 “얼마 전 문병 온 며느리한테 내가 키운 쪽파를 줬다”며 자랑스러워했다.

○ 원예치료는 경도와 중도 치매노인에게 적당

최근 원예치료를 하는 치매노인이 늘고 있다. 치매노인이 약물치료와 함께 식물을 키우면 시공간을 인식하는 능력, 주의집중력, 언어능력 향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원예치료사 조문경 씨의 건국대 원예학과 박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치매환자 15명을 약물치료군(5명)과 ‘약물치료+원예치료군’(10명)으로 나눠 2개월간 경과를 지켜보았더니 ‘약물치료군’은 기억력이 향상됐지만 시공간 인지능력이 감소하고 우울감이 늘어난 반면 ‘약물치료+원예치료군’은 시공간 인지능력, 주의집중력, 언어능력이 모두 좋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모든 치매환자에게 원예치료가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치매는 시공간 인지능력, 기억력, 언어능력, 일상생활 능력 등에 따라 경도(輕度), 중도(中度), 고도(高度)의 3단계로 나뉜다. 원예치료는 경도와 중도 치매에 효과적이다. 거의 누워서 생활하고 주변 구분능력이 없는 고도 치매환자에게는 원예치료가 적당하지 않다.

배추 화분을 키우는 이 할머니는 경도와 중도의 중간에 해당하는 치매를 앓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자주 잊어버리며, 했던 얘기를 자꾸 반복하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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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을 키우며 자신감 키워


전문가들은 치매환자가 식물을 키우면 인지능력이 좋아질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측면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식물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생활에 활력이 생기고 열심히 운동하려는 의지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은아 대한치매학회 이사는 “치매환자는 뇌기능이 소실돼 외부 자극에 관심이 없어지고 자신감과 자존감도 없어진다”며 “원예치료를 통해 식물을 키우고 열매 등을 수확해 서로 나눠 먹는 데서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5년 전부터 치매를 앓아 온 김용원(76) 할아버지는 올 초 화분을 키우면서 대인관계가 부쩍 좋아졌다. 그동안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간병인이나 주변 사람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적대적으로 대하곤 했다. 누가 말을 걸면 “나를 동정해서 그런다”며 화를 냈다.

김 할아버지는 식물을 키우면서 마음을 열었다. 식물을 주제로 주변 사람들과 대화도 자주 나누게 됐다. 공격적인 성향도 부쩍 줄었다.

김 할아버지는 “식물을 키우다 보니 친구도 늘었다”고 말했다.

4년 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는 김량월(74) 할머니는 “쪽파를 키워 나눠 먹는 것이 즐겁다”고 말했다. 그는 “싹이 나는 것을 보면 대견하다”며 “부러워하는 다른 할머니들한테 쪽파를 나눠 준다”고 말했다.

○ 주변 사람의 세심한 관심 필요

치매노인이 키우기에 적당한 식물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손이 많이 가지 않고, 잘 크는 식물이 좋다. 화분이나 아파트 주변 텃밭에서 키울 수 있는 식물은 꽃집, 원예상 등에서 씨앗을 쉽게 구할 수 있다.

가을에는 국화, 겨울에는 시클라멘, 봄에는 튤립이나 히아신스 등 계절 식물을 기르면 계절의 변화도 느낄 수 있다.

무순, 싹메밀 등 새싹채소는 계절에 관계없이 간편하게 기를 수 있다. 컵이나 접시에 부직포를 깔고 물을 촉촉이 뿌린 다음 씨를 올려놓으면 여름에는 5∼7일, 겨울에는 2주 후 무순과 싹메밀을 먹을 수 있다.

방울토마토, 배추 등 채소류는 일반적으로 늦여름에 심어 3개월 후 수확할 수 있다.

가족과 주변 사람의 관심도 중요하다. 식물을 키우는 치매노인은 식물이 죽었을 때 커다란 상실감을 느낀다. 간병인과 주변 사람들은 치매노인이 보지 않을 때 싱싱한 묘나 싹으로 갈아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원예치료사 조문경 씨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은 치매노인과 함께 식물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노인의 손을 잡아주고 얘기를 잘 들어주는 등 친근하게 대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 원예치료용 식물엔… ▼

무 - 싹메밀 - 방울토마토 등

수확해서 먹는 식물이 좋아

치매 노인을 위한 원예치료용 식물은 노인에게 친숙한 것이 좋다.

무, 싹메밀, 방울토마토 등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싹과 열매를 수확해서 먹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새싹채소를 기를 때는 특별한 장소가 필요 없고 작은 상자 등에서 쉽게 재배할 수 있다. 7∼15일 기르면 수확할 수 있다.

무는 생장 속도가 빠르고 싹을 생으로 먹을 수 있다. 15∼30도의 온도에서 싹이 나는데 여름은 5∼7일, 겨울은 2주 정도 있으면 싹을 뜯어 먹을 수 있다.

싹메밀은 메밀의 어린 싹을 말한다. 양질의 단백질, 신진대사를 높이는 비타민 B1, B2가 많고 혈관보강제로 주목받는 ‘루틴’ 성분도 풍부해 노인이 먹으면 좋다.

방울토마토는 5월에 모종을 심으면 9월에 수확할 수 있다. 모종을 구입해 화분에 심고 130cm 길이의 지주를 세운 후 햇빛을 충분히 받도록 해주면 된다.

또 치매 노인의 특성상 병충해에 강하고 물 주는 것을 몇 번 잊어버려도 잘 자라는 식물이 좋다.

틸란드시아는 공기 중의 습기를 흡수하며 살기 때문에 가끔씩 분무해 주기만 하면 된다. 줄기와 잎에 수분을 많이 저장하고 있는 선인장도 좋다. 만약 선인장이 가시 때문에 염려된다면 돌나물과의 크라슐라와 에케베리아, 국화과의 세네시오 등도 물 주는 것을 한두 번 잊어버려도 괜찮을 정도로 생명력이 강하다.

향기가 좋은 캐모마일, 민트, 라벤더 등 허브 식물도 원예치료용으로 많이 쓰인다.

캐모마일은 진정 효과가 있어 불면증이 있는 치매 노인에게 좋다. 라벤더, 마조람도 불면증 해소에 도움이 된다.

치매 노인에게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게 해주고 싶다면 민들레, 코스모스, 초롱꽃, 국화 등이 좋다.

그러나 잎, 꽃, 열매에 독성이 있는 식물은 피해야 한다.

치매 노인이 무심코 먹으면 입과 식도가 부어오르거나 구토, 설사, 경련을 일으킬 수 있고 자칫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잉글리시아이비, 디펜바키아 등은 보기엔 좋지만 독성이 있는 식물들이다.
 
동아일보  2008.10.08 02:49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810080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