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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실버관련/시니어소식, 정보

마누라·영감 없어도 활기찬 노년


'싱글 실버' 100만 시대<上>

할리데이비슨 타고 뮤지컬 배우 되고

고리타분한 독거노인 거부… "내 멋에 산다"

상당수는 어려운 생활… 사회적인 지원 필요


"먹지 않아도 배 부르고, 잠을 자도 자는 게 아냐. 심장이 마구 터질 것 같은 기분이야. 이게 잘못이니? 이렇게 세상을 향해 소리치고 싶은데 잘못이니?"

지난 24일 서울 중구 충무아트홀 연습실에서 만난 박춘자(69)씨는 노인의 사랑을 다른 국내 초연 뮤지컬 '러브'에 나오는 여주인공 니나의 대사를 멋지게 읊었다. 그는 2년 전 간호대학 교수를 퇴임한 후 뮤지컬 가수로 데뷔했다. 남편과는 사별한 지 오래고, 남매도 모두 출가하자 홀가분하게 지내고 싶다며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해 봄부터 충무아트홀에서 뮤지컬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6주간 수업을 들은 후 창작 뮤지컬 '심청'에 출연했죠. 새로운 감각으로 세포 하나하나가 다시 깨어나는 느낌이었어요."

올 2월엔 '러브' 무대에 섰다. 오디션 참가자 240명 가운데 10대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최종 합격자 23명에 들었다. 박씨는 100만원 남짓한 첫 월급을 모두 털어 표를 샀고 주변 친구들에게 뮤지컬을 보러 오라고 나눠줬다. "아들, 딸, 손자들은 물론 관객들의 박수와 커튼콜 받는 기분이 정말 뿌듯했죠."

작년 여름‘2종 소형 운전면허’를 딴 최양환(69)씨가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도로를 달리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오랜 교수 생활로 매달 200만원의 연금을 받는 데다, 뮤지컬 공연이 있을 때도 약간의 월급을 받기 때문에 자식 도움 없이도 어려움은 없다. 박씨는 현재 8개월에 걸친 심화 과정을 다니며 오는 11월 뮤지컬 '코러스'를 무대에 올릴 꿈에 부풀어 있다.

'싱글 실버(독거노인)' 100만 시대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보건복지가족부통계청에 따르면 자식이나 배우자 없이 혼자 사는 노인 '싱글 실버'는 2008년 현재 93만명을 넘어서 65세 이상 전체 노인 인구의 18%를 차지했다. 지난 1980년 4.8%에 머물렀으나 1990년 9.5%, 2000년에 16.8%를 기록한 이후 증가 추세다. 내년에는 97만6000명, 2010년에는 102만1000명, 2011년에는 전체 노인인구의 19.2%인 106만5000명에 달할 것으로 추계됐다.

하지만 최근 들어 '홀로 된 가난한 노인'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건강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혼자만의 삶을 선택해 인생의 황혼기를 만끽하는 것이다. 박씨처럼 못 다 이룬 꿈을 좇아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도 하고, 꾸준히 가꿔온 취미를 살려 여유 있는 노후를 즐기거나, 남을 위해 봉사하는 데서 의미를 찾기도 한다.

최양환(69)씨는 젊었을 때 취미를 발전시켜 새로운 영역에까지 적극 도전한 경우다. 그는 요즘 오토바이 '할리데이비슨'에 푹 빠져 살고 있다. "겉으론 거칠어 보여도 사실은 섬세하고 낭만적인 게 사나이 자존심과 똑같다"며 할리데이비슨의 매력을 말했다.

하늘색 셔츠와 청바지에 모자를 쓰고, 큼직한 장식이 달린 허리띠를 맨 최씨의 모습은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작년 여름, 오직 할리데이비슨을 타기 위해 2종 소형 운전면허를 딴 그는 1년도 지나지 않아 1만㎞를 넘게 달렸다. "면허학원에서 어르신한텐 어려우니 한가한 겨울에 오시면 천천히 잘 가르쳐 드리겠다는 거야. 어떻게 겨울까지 기다려? 한 달 만에 땄지."

금요일 저녁이면 애마를 닦아 광을 내고, 주말이면 '할리데이비슨 오너스 그룹(H.O.G)' 회원 대여섯명과 함께 바닷가와 산을 찾아 달리는 것이 그의 큰 즐거움이다. 지금은 공식 행사 참석 외에는 출퇴근 때도 할리데이비슨을 몰고 다닌다.

최씨는 3년 전에는 사륜구동 자동차 6대를 이끌고 중국 대륙을 횡단했다. 최씨가 독일 유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자동차 경주에 출전한 경험이 그대로 이어진 것이다.

독일 회사 BLG의 한국지사 대표로 일하는 그는 3년 전 아내와 헤어졌지만 독신 생활을 즐기는 지금이 싫지 않다고 했다. "난 요리도 잘 하고, 사람도 좋아해서 별 문제가 없어요. 남자들 나이 들어 혼자되면 고생한다지만, 난 달라요."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봉사활동 하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 노인환(76)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애정을 살려 봉사활동을 하는 경우다.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음악에 대한 꿈을 접고, 결국 봉제업체를 운영하며 살아왔죠. 그래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지난 1997년 외환위기로 경영이 어려워진 사업을 정리한 후, 그가 찾은 길은 예술의 전당에서 안내 자원봉사를 맡은 것이다. "세 딸은 모두 출가했고, 담낭암으로 아내마저 잃은 후에는 도무지 살 맛이 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예술의 전당에서 '명사 도우미'를 모집한다기에 당장 뛰어갔죠." 이후 그는 11년째 한결같이 나비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객석 안내를 하고 있다.

"미국서 음악을 전공한 둘째 딸 때문에 해외서도 음악회를 많이 갔는데, 백발 희끗희끗한 노인 분들이 안내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더라구. 나도 공연 있는 날이면 오후 4시에 면도를 새로 하고 정장을 차려 입어요. 공연 1시간 전부터 영어, 중국어, 일어를 섞어 안내하니까 외국 관객들도 좋아하더군요."

노씨는 공연장에서 얼굴을 익힌 연주자들과 함께 성남에 있는 소망재활원에서 중증환자들을 위해 연주회도 열고 있다.

사업으로 모은 예금에서 나오는 이자 100만원 남짓과, 번역 등의 아르바이트로 버는 40만∼50만원으로 생활을 꾸려간다는 노씨는 욕심 부리지 않으면 부족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자식들 도움 없이도 일주일에 한두 번 가사 도우미 쓰면서 생활할 수 있다"며 "혼자서 가만히 바흐를 듣고 있으면 천상이 따로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복지부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2007년 현재 혼자 사는 노인들의 평균 월소득은 25만4000원. 현실적으로 혼자만의 삶이 녹록지 않은 이들이 더 많다.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한경혜 교수는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노인에게 큰 자신감과 만족감을 줄 수 있다"며 "선진국처럼 노인들이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사회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8.07.30 06:18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30/20080730000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