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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의사, 청진기 놓다


20일 오후 서울 합정동의 홀트부속의원에서 조병국 전 원장이 입양 대상 여자 아이를 진료하며 웃고 있다. /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50년간 입양아 5만여명에 '사랑의 손길'● 75세 조병국 전 홀트부속의원 원장
"아이들이 좋아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15년전 정년퇴임 불구 계속 봉사… 후임자 나와


20일 오전 11시 서울 합정동 홀트아동복지회건물 1층의 홀트부속의원. 진료실 안에서는 조병국(여·75) 전 홀트부속의원 원장이 미국으로 입양될 9개월 난 여자아이를 검진하고 있었다. 160㎝도 안 되는 작은 키에 구부정한 허리, 백발에다 얼굴엔 주름이 가득했지만 아이를 살피는 손놀림은 빠르고 능숙했다.

아이의 배, 다리, 엉덩이에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고는 가슴과 배를 살짝 누르고 청진기를 댔다. 손가락 마디만한 의료용 플라스틱 망치로 아이 무릎을 치기도 했다. 10여 분 검진하는 동안 조씨는 아이를 들었다 놓기를 네다섯 번 반복했다.

진료를 마친 조씨가 한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자,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위탁시설 여직원이 다른 아이를 품에 안고 진료실로 들어왔다.

◆입양아 대모(代母), 청진기 놓는다

조씨는 지금까지 50년간 홀트부속의원과 홀트일산복지타운에서 국내외로 입양되는 아이들의 건강을 돌봐온 '입양아의 대모(代母)'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간 입양아는 5만 명이 넘는다. 그런 조씨가 곧 청진기를 놓는다. 최근 심해진 어깨 통증으로 더 이상 일하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한 번 진료할 때마다 아이를 네다섯 번씩 들어올리느라 어깨 관절이 상한 탓이다.

그는 1958년 연세대 의과대학 세브란스 병원에서 레지던트(전공의) 과정을 밟던 중 파견근무를 하면서 홀트아동복지회와 인연을 맺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버려지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이다 보니 정상이 아닌 경우가 많았죠. 전염병에 걸려 신음하는 아이, 영양실조에 걸려 정신지체아가 된 아이…."

그런 아이들이 그의 손길과 치료를 받고는 불과 한두 달 만에 건강을 되찾고 볼에도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것을 보면서 그는 평생의 진로를 결정했다. 레지던트 과정을 마치고 서울시립아동병원을 거쳐 홀트부속의원 의사로 취직한 것이다. 월급은 다른 병원에 다니는 친구들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까지는 100만원을 넘지 않았고, 홀트부속의원 원장일 때도 300만원 남짓이었다. 국내 전문의 초임이 700만~1000만원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원장인 그가 '초보 의사' 대접도 못 받은 것이다.

조씨는 "아이들이 좋아서, 버림받은 아이들이 불쌍해서, 그 아이들에게 새 가정을 찾아주는 게 좋아서 일을 한 거지"라고 했다.

홀트아동복지회 김은희(여·35)씨는 "자신의 능력을 아이들을 돌보는 데 쓰겠다는 신념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조씨는 원래 1993년 정년을 맞아 퇴임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떠나지 못했다. '전(前) 원장' 직함으로 아이들을 계속 돌봤다. 입양아 곁을 떠나지 못한 것은 그의 가족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1남6녀 중 장녀로 태어난 조씨는 4살 때 바로 밑 여동생을 혈액질환으로, 10살 때는 둘째 여동생을 홍역으로 잃었다. 고등학교 때 6·25 전쟁 피란길에서는 죽은 아이들이 길가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광경도 보았다.

그는 "너무나 쉽게 죽어버리는 아이들이 불쌍해서 꼭 아이들을 살리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는데 홀트에서 그 결심을 제대로 꽃피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어깨 통증으로 '진짜 은퇴'가 불가피해진 최근 후임자가 마침 나타났다. 1년 4개월 전 공모를 했으나 지금까지는 월급 300만원 남짓한 자리에 선뜻 응하는 의사가 드물었다. 그는 "몸이 다 닳을 때까지 이 일을 하자고 결심했는데 이제 그만둘 때가 된 거지"라고 말했다.

◆기억에 남는 아이들

조씨는 50년간 거쳐간 입양아들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했다. 1970년 대 초반 사직공원 근처에서 라면박스에 담긴 채로 발견된 태희. 발견될 당시 몸에 어머니 '태(胎)'가 남아 있던 까닭에 조씨가 이름 붙여준 여자 아이다. 선천성 심장질환이 있었던 태희는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당시 국내 의료 기술로는 6살이 돼야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아이의 병세가 심해지자 조씨는 4살인 태희를 안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태희는 뉴욕공항에 도착한 순간 숨을 거뒀다. 조씨는 "그 아이를 살리지 못한 게 아직도 한(恨)으로 남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슬픔보다 보람이 많았다고 했다. 1980년대 초반 철도 사고로 부모를 잃고 두 다리가 절단된 아이가 있었다. 조씨는 그 아이를 치료해 미국으로 입양을 보냈는데 10년쯤 뒤 그 아이가 의족을 하고 스케이트 선수로 경기에 나선 모습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고 한다. 조씨는 "그 사진을 보면서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1997년엔 캐나다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는 20대 청년이 조씨를 찾아왔다. 선천성 청각장애였지만 입양된 뒤 수술을 받고 약하나마 청력을 되찾아 결국 바이올린 연주자가 된 청년이었다. 그는 조씨에게 바이올린 연주곡을 들려주고 "한겨울에 버려진 저를 선생님이 돌봐주지 않았으면 아마 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인사를 했다.

미국으로 입양을 보낸 뇌성마비 소년이 소아재활의학 전문의가 되어 조씨를 찾아온 적도 있었다.

조씨는 "그 친구가 8년 전에 한국에서 여자아이를 입양했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반가웠다"며 "아이들이 새 가정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소식을 듣는 게 내 인생의 보람"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8.10.23 08:42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22/2008102201835.html